연재 중 Mo' Black 09화

잉어킹

90년대생의 MZ이야기

by 모블랙
Them Changes - Thundercat
청계천의 잉어킹


“형 뭐해요~ 빨리 와요. “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는 일행이 나를 채근한다. 시계를 본다. 12:05. 점심약속에 늦었다. ‘식당 앞에서 12시에 만나요.’ 그게 단톡방에서 마지막으로 나눈 메시지였다.


내년이면 육아휴직을 들어가는 동료를 위해 친한 이들 몇 명이서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날이었다.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사무실을 나서는 것이 늦어버렸다.


서둘러 걸으며 청계천이 흐르는 다리 위를 지나친다. 매일 지나치던 길에 이상한 조형물이 하나 있다. 자세히 보니 익숙한 캐릭터가 들어온다. 잉어킹. 오랜만이네, 반갑다. 나는 늦은 것도 잊은 채 발걸음을 멈추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찰칵, 찰칵.




포켓몬스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함께했다. 주로 게임으로 포켓몬을 즐겼다. 포켓몬 빵이 유행할 때는 스티커를 전부 모으겠다고 동네 슈퍼의 빵을 전부 쓸고 다녔다. 이 많은 빵을 왜 샀냐고, 네가 다 먹을 거냐고 등짝을 때리는 어머니의 구박에도 내 포켓몬 스티커(띠부띠부씰)에 대한 사랑은 멈출 줄 몰랐다.


포켓몬은 작은 닌텐도 게임기와 함께 내 초등학교 시절을 수놓았다. 영어로 번역된 게임팩이 귀해서 구하지 못하던 시절, 한 글자도 모르는 일본어로 된 버전으로도 좌충우돌 실패해 가며 포켓몬을 즐겼다. 두려움이 없던 어린 시절, 실패는 그냥 즐기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중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가 있었다. 그게 바로 잉어킹이다.


포켓몬 게임 속 잉어킹에 대한 설명


설명을 보라. 첫 줄부터 암담하다. 존재가 가망이 없는 녀석이다. 등치는 산만한데 할 줄 아는 것이 ‘튀어 오르기’ 밖에 없는 포켓몬이다. 게임 초반부에 낚싯대를 얻어 낚시를 시작하면 잉어킹만 잡혔다. 새로운 포켓몬을 얻었다는 기쁨도 잠시, 곧이어 고난이 펼쳐졌다.


잉어킹을 육성하려면 다른 동료 포켓몬들의 희생이 필수적이었다. 펄떡거리는 재주밖에 없는 녀석은 전투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까닭에 다른 녀석들이 조금 더 버텨주고, 조금 더 싸워줘야 우리 팀은 승리를 할 수 있었다.


다른 기술 없냐고!


그런데 왜 나는 잉어킹을 좋아했을까? 그 답은 잉어킹의 성장과정에 있다. 인고의 시간을 잉어킹과 함께 묵묵히 견뎌내면, 어느 날 ‘잉어킹’이라는 애벌레는 ‘갸라도스’라는 나비로 진화한다. 튀어오르기만 하던 허약한 잉어킹은 이제 잊자. 갸라도스는 물고기이자 용이었다. 헤엄도 치고 하늘도 나는 전설적인 존재.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주인공인 ‘지우’도 항상 육성하는 포켓몬으로, 갸라도스는 강력함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그 보상을 얻기 위해 나와 잉어킹은 기꺼이 수모를 견뎠다.


늠름하고 영롱한 갸라도스




사람은 누구나 잉어킹과 같은 시기를 겪는다. 태어나서 부모의 절대적인 보호아래서 성장한다. 몸을 뒤집고,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다. 그건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직장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은 모두 잉어킹과 같은 존재들이다. 처음에는 그저 펄떡거리는 잉어킹처럼, 큰 소리로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외치며 인사하는 것이 최선이다.


잉어킹은 모두 갸라도스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잉어킹들이 처음부터 갸라도스이길 바란다. 잉어킹들도 본인들이 이미 갸라도스인 줄 착각한다. 신입사원이 갸라도스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 기간 동안 신입사원의 인내와 더불어 동료의 배려와 희생이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많은 신입사원들이 갸라도스가 되지 못한 채 빠른 기간 내에 회사를 떠난다. 그리고는 다시는 다른 포켓몬들과 여행을 떠나지 않겠다며 세상과 담을 쌓고 홀로 사는 경우도 많이 봤다.


혹자들은 얘기한다. 요즘 MZ들은 이기적이라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인내심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조금 가르칠만하면 힘들다고 뛰쳐나간다고. 절반만 맞는 소리다. 그들이 인내심이 부족한 것도 맞지만, 특별히 요즘 MZ의 문제라고는 별로 생각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잉어킹이던 시절엔 비슷했다. 신입사원의 부족한 인내심만큼, 선배들의 배려와 희생도 부족하다.


개인주의를 넘어선 파편화. 사회 곳곳에서 인간의 소외가 발생한다. 어딜 가도 네 편과 내편을 나눈다. 편을 나누려는 마음에는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지난번 혐오의 시대라는 글을 쓰면서, 서로의 대한 사랑만이 이 혐오의 시대를 끝장낼 유일한 방법이라 밝힌 적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나는 ‘먼저 주는 사랑’이 타인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내가 조금 더 희생하고, 조금 더 배려하고. 내 일처럼 마음 아파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노력하고.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애쓰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빚진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누구에겐가 빚을 지고 있다. 외딴 산골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태어나서부터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빚을 갚는 방법은, 빚을 진 상대방에게 되돌려주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누군가에게 기꺼이 채권자가 되어주는 것도 빚을 갚는 좋은 방법이다. 차용증에 써 있는 빚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사랑에는 변제기한이 없다.


타인에게 건넨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는다. 우리는 그렇게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태어난 존재들이다. 기꺼이 사랑하자. 후회 없이 사랑하자. 결국 그 사랑은 돌고 돌아 나에게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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