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스무살
산 너머로 달아나던 해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던 남이섬도 해가 지자 시나브로 고요해졌다. 오늘 남이섬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이들은 기현의 동아리원들(블루트레인)이 유일해 보였다.
기현은 방에 들러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약속장소로 나갔다. 세 시간의 시간 동안 조별로 다들 금세 가까워진 듯했다.
“기현아 여기~!”
기현을 발견한 새롬이 반가운 표정으로 기현이를 불렀다.
“다들 와 계셨네요?”
이미 선배들과 새롬은 자리를 잡고 숯이 들어올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현이 맥주 한잔 할래? “
민철이 기현에게 잔을 내밀었다.
“네.. 한 잔 주세요”
기현의 잔이 치워지고 그들은 숯불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앉아 건배를 했다.
”너무 다들 많이 마시지 말고! 이따 회장오빠가 저녁 먹고 이벤트 있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저녁 먹을 때는 다들 적당히 마셔요! “
가영의 당부와 함께 저녁식사가 시작됐다. 각종 부위의 고기는 물론, 구워 먹을 야채들, 소시지가 차례대로 불판에 올라왔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가지고 왔는지 모를 새우까지 구워 먹고, 라면까지 끓여 먹고 나서야 저녁식사가 끝나갔다.
“자 잠깐 집중해 주세요.”
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다들 충분히 드셨어요? “
“네!!” 다들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모인 게 뭐 때문인지 다들 아시죠? 아직 우리 주인공들을 소개 못한 거 같은데, 이제 한 번 소개를 들어볼까요? 신입생들은 잠깐 앞으로 나와주세요 “
박수소리와 함께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를 하던 테이블에서 신입생처럼 보이는 멤버들이 둘셋씩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자연스럽게 소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명씩 진행되었다. 복학생 선배들에게 가장 호응이 좋았던 새롬의 소개 순서가 지나고, 마지막으로 기현의 차례가 되었다.
“……(생략) 그렇게 블루트레인에 가입하게 됐고요, 아직 악기는 못 정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현을 제외한 다른 동기들은 전부 악기를 정했다. 아니, 이미 그들은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그것을 그대로 동아리에서도 연주하기로 한 듯했다.
“기현이 드럼 할래? “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처음 보는 선배 한 명이 구석에서 말을 꺼냈다.
“드럼이요??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
기현은 뜻밖의 제안에 말꼬리를 흐렸다.
“우선 악기 해본 적 없다고 하니 당연히 악보는 못 볼 거고, 그럼 멜로디악기는 좀 시간이 걸릴 거야. 그리고 자기 악기가 없으면 동방에 있는 악기는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써야 하니 좀처럼 실력을 늘리기도 어려울 거고. 근데 드럼은 그냥 드럼 스틱이랑 패드랑 메트로놈만 있으면 우선 시작할 수 있어. 소리도 시끄럽지 않아서 혼자 방에서 연습해도 되고. 드럼도 악보를 봐야 되지만, 피아노 악보같이 어렵진 않아. 우선 기본을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드럼세트에서 연주를 시작하면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너희 동기 중에 드럼이 없네. 기현이 네가 드럼을 맡아주면 동기들끼리도 공연할 수 있겠다. “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기현은 뜸을 들였다. 그러나 딱히 대안도 없었고, 선배의 말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게 느껴졌다.
“네 그럼 드럼 한 번 배워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기현이 꾸벅 인사를 하며 대답했다.
“그래 내가 처음에 좀 알려줄게.” 기현에게 드럼을 권한 선배가 밝은 표정으로 기현에게 말을 건넸다.
“자 이렇게 신입생들 자기소개도 끝났고 파트분배도 끝났습니다.” 선배들이 모두 일어나서 크게 박수를 쳐줬다. 마치 소설 해리포터에서 기숙사를 정하는 것처럼 <Blue Train>의 일종의 통과의례인 듯싶었다. 기현은 그래도 뭔가 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아 안심했다.
“많이 기다리셨죠? 드디어 보물찾기 시간입니다”
회장이 들뜬 목소리로 청중을 보며 이야기했다.
“아, 오빠 그냥 좀 주면 안돼요?? 작년에도 다들 귀찮아했잖아 “ 가만히 있던 가영이 볼멘 목소리로 불평했다.
“가영이 너 작년에도 막상 하니까 제일 재밌어했으면서 또 그러네, 자 조장들 앞으로 얼른 나오세요”
회장은 조장들을 앞으로 불러 세운뒤 인원수에 맞게 종이를 나누어주었다. 가영에게 종이를 건네받은 기현은 그 종이가 지도라는걸 금새 알게 되었다.
“우리 블루트레인 신입생 환영회 전통. 보물찾기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아까 저랑 임원들이 숙소 근처에 보물을 숨겨놓았습니다. 올해도 감사하게도 졸업한 OB선배들이 협찬해 주셨고요. 보물지도에 표시된 장소를 잘 찾아보면 보물 종이가 있습니다. 선물은 보스헤드셋, 서울재즈페스티벌 공연 티켓 같은 대박 상품들 부터, 이번 정기공연 오프닝무대 우선권 같은 것까지 다양합니다. 신입생들은 선배들과 짝을 이루어서 2인 1조로 보물 찾기를 하면 돼요. 자 그럼 왼쪽 신입생부터 통 안에 든 선배 이름을 한 명씩 뽑으시면 됩니다.”
덜그럭 덜그럭. 마이크를 내려놓고 회장형은 미리 준비해 놓은 뽑기 통을 흔들면서 신입생들에게 다가왔다. 한 명 한 명 신입생들이 선배들의 이름을 뽑을 때마다 환호와 놀림이 뒤섞인 웃음이 이어졌다. 새롬은 민철의 이름을 뽑았고, 주위의 선배들은 모두 민철에게 부럽다며 ‘우~~~‘하며 야유를 보냈다.
“고.. 윤정” 기현은 본인이 뽑은 종이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앞으로 나오는 윤정의 표정에는 묘한 미소가 서려있었다.
“자 그럼 모두 짝이 정해졌네요. 시간은 한 시간입니다. 9시까지는 이 자리로 모두 늦지 않게 모여주세요. 나갈 때 손전등 잊지 마세요. 출발!”
회장의 구호와 함께 바쁜 걸음으로 사람들이 흩어졌다. 기현은 숙소 입구에서 손전등을 챙겨서 윤정과 함께 길을 나섰다. 곁눈질로 본 윤정의 옆모습에선 여전히 옅은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산속의 밤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조금 발을 내딛자 나무 사이로 뻗은 길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보였다. 그렇게 신입생 환영회는 무르익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