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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블랙 Mar 19. 2024

습작8

1부:스무살

보물지도는 생각보다 독도하기 어렵게 돼있었다. 그들은 어두컴컴한 길을 헤치면서 'X자' 표시가 된 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근처엔 보물이 숨겨있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머쓱해진 기현은 무슨 말이라도 윤정에게 걸어볼까 했으나 입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지도 좀 줘 볼래?”

기현을 말없이 따라오던 윤정이 먼저 입을 뗐다.

“아.. 네네.. 여기요”


윤정은 손전등의 끝을 입으로 가져가서 가볍게 물더니 주머니에서 머리끈을 꺼내 머리를 뒤로 묶었다.

그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지도와 나무를 번갈아보더니 ‘에휴’라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여기가 맞는 거 같은데."

“그쵸.. 저도 여기 같은데.. 분명 숙소에서부터 보면서 왔거든요.”

“에잉 몰라~ 못 찾으면 못 찾는 거지 뭐. 우리 좀 앉아서 쉴까?”

윤정은 손으로 벤치를 가리키며 기현에게 물었다.

“네..”


벤치에 앉은 그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관광객들이 떠나고 어둠이 드리운 남이섬은 새로운 주인들이 섬을 채운 듯했다. 청설모가 나뭇잎을 헤치는 소리, 벌레들이 내는 작은 소음, 새들의 구애소리, 바람이 가지를 흔드는 소리 등 벤치에 앉아있자니 자연의 작은 오케스트라를 듣는 것 같았다.


“기현아.”

“네..?”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윤정이었다.


“신입생 환영회는 어때?“

“아.. 음.. 재밌어요. 아까 같은 조 선배들이랑 얘기도 많이 했어요. 동기도 알게 됐고”

“맞아 동아리방에서 보다가도 나오면 또 달라 보이고 더 친해지긴 하지”


“선배는 무슨 악기 하세요?”

기현이 조금 용기를 내어 먼저 윤정에게 질문했다.

“나는 악기는 따로 못 해. 보컬이야”

“아.. 보컬이셨구나."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는 영 소질이 없는 기현이었다.


"선배 프랑스에선 뭐 했어요?"

기현은 낮에 윤정과 점심을 먹으며 했던 대화를 상기해 냈다.

"아.. 그게 부모님 사업 때문에 가끔 나도 가게 돼"

"혹시 무슨 일 하시는지 여쭤봐도 돼요?"

기현의 질문에 윤정은 일순간 망설이는 듯하였다.

"음.. 아빠가 패션 관련 사업을 하시는데 프랑스에도 거래처가 있어. 나는 보통 패션쇼 할 때 부모님 따라가. 사실 패션에 대해서 아는 것도, 배운 것도 없는데 내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는 게 우연히 잘 맞아떨어졌어. 그래서 특히 아빠가 내 안목을 믿으시는 편이야. 이제는 가기 싫어도 억지로 데리고 가셔."

"우와.. 누나 대단하시네요. 혹시 제가 아는 브랜드일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어.. 근데 집안일은 내가 동아리에서 거의 얘기를 안 하거든. 기현이도 오늘 나랑 얘기 남한테 말 안 했으면 좋겠어. 그래줄 수 있지?"

"네 물론이죠"

역시 윤정은 별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나(기현)는 얼마나 초라한가. 배경도 가진 것도 그렇다고 딱히 매력도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남자. 그래도 기현은 윤정과의 비밀이 하나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선배 혹시 저 동아리 처음 데려갔던 거 기억나세요?"

기현은 맘속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

"당연하지! 얼마 전 일인데 어떻게 잊어먹겠어"

"혹시 그때 저 왜 데리고 가셨어요? 여태 궁금했는데 못 물어봤어요"

잠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음.. 그냥."

"그냥.. 이요?"

"응 그냥."

"..."

"그냥 그러고 싶었어. 그냥 그때 네가 그렇게 앉아 있는 걸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났어"

"옛날 생각이요?"

"응. 나 신입생 때. 내가 기현이 너처럼 그렇게 입학하고 나서 공강 때 뭐 해야 될지 몰라서 벤치에 앉아서 하늘만 보고 그랬거든"

"그럼 그때 선배도 그때 벤치에 앉아있다가 다른 선배가 동아리로 스카우트한 거예요?"

"스카웃이라고 하니까 웃긴다 하하. 맞아. 나도 그렇게 블루트레인에 가입했어."

"그럼 그때 선배를 동아리에 데려간 선배도 오늘 같이 온 사람들 중에 있어요?"

"아니.. 없어. 그 선배는 군대 갔거든."

윤정의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허전함이 느껴졌다. 기현은 윤정의 눈망울엔 일순간 슬픔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신입생 시절 환영엠티를 왔을 때도 그 선배를 파트너로 우연히 뽑아서 같이 보물 찾기를 했어. 그런데 아까 네가 나를 뽑았길래 그때 생각이 나서 재밌더라고."


'그래서 아까 내가 이름 불렀을 때 웃었구나..' 기현은 윤정의 미소가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슬퍼졌다.


"아 그렇구나.. 신기하네요. 저도 놀랐어요 제가 선배이름 뽑았을 때.."

윤정은 기현을 빤히 바라보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지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 혹시?"

윤정은 갑자기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벌떡 일어서서 나무로 걸어갔다. 분명 아까 지도에 표시된 위치였으나 나무 말곤 아무것도 없던 곳이었다.

"여깄네!!!!"

윤정은 환한 미소로 기현에게 종이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기현은 벌떡 일어나 윤정에게로 달려갔다.


"선배 어떻게 찾았어요???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이상하더라고 분명히 이 위치에 나무 한 그루밖에 없는데. 그리고 지도를 아무리 봐도 이 위치가 맞잖아. 근데 이거 봐 바."

윤정은 손가락으로 지도 위 'X'모양을 가리켰다.

"이건 아까도 본 건데.." 기현은 웅얼거렸다.

"아니 아니 한 번 잘 봐바."

윤정의 대답에 기현은 다시 한번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지도를 들여다보니 X자 표시 주위로 동그란 원이 그려져 있었다. 아까도 본 원 모양이었으나 별생각 없이 지나쳤었다.

"동그라미를 왜 굳이 쳐놨을까? 이상하지 않아?"

윤정은 그리고 기현의 손을 덥석 잡아서 나무에 가까이 데려갔다. 그리고는 나무중간에 나있는 구멍을 가리켰다.

"이거...! 동그라미가 이거였던 거야!!"

기현은 그때서야 X자를 감싸는 원이 나무중턱에 새가 파놓은듯한 구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힌트라고 줬던 것이라니.. 참으로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는 결국 못 찾았어 허탕만 쳤거든.. 회장오빠가 이상한 취향이 있어서 이런 이벤트는 늘 어렵고 알쏭달쏭하게 기획하더라고. 그래도 이번엔 우리가 같이 찾았네!"

기현과 윤정은 종이를 펼쳐보았다. 보물종이에는 <서울재즈페스티벌 3일권 2매>라고 쓰여있었다.

기현은 윤정이 방금 전 이야기 한 '우리'라는 윤정의 표현이 든든했다. 우리라는 단어는 묘한 힘과 용기를 주는 듯했다.


"선배.. 이거 저랑 같이 가실래요?"

기현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고 윤정에게 말했다. 고개를 푹 숙여 윤정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진 못했으나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


윤정은 또 뜸을 들였다.


"기현아"

윤정이 나지막이 기현을 불렀다. 기현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윤정을 바라보았다.

"그래 같이 찾았으니까 같이 가자"

윤정은 기현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기현은 살면서 뭔가에 용기를 내 본적이 별로 없었다. 당연히 연애를 해 본 적도 없었다. 학창 시절 두근거리는 상대들은 가끔 등장했지만, 그마저도 멀리서 바라볼 뿐 말도 한 번 제대로 붙여본 적이 없었다.


윤정이 아니었다면 기현의 대학생활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동아리는커녕 지금도 알바-수업-집만 전전하다 핸드폰이나 보며 시간을 죽였을 것이다. 윤정은 기현의 손을 잡아 본격적인 대학생활로 이끌어준 장본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윤정은 기현에게 은인이었다. 그런 윤정에게 기현은 호감을 느꼈다. 이성적으로 매력이 있는 것도 분명 사실이었다. 그러나 뭔가 기현에게 윤정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기현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이질적인 삶을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그런 그녀와 재즈페스티벌을 보러 간다. 그것도 2박 3일이나.  기현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현의 상상의 나래는 겉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5월 중순, 따뜻한 봄날에 있을 재즈페스티벌에 그녀와 함께 돗자리를 깔고 공연을 본다.


기현은 두달도 안남은 서재패가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확정적인 미래요 엄연한 현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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