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 일기. 난임을 겪지 않은(않을) 사람들이 읽어주길 바라며
1.
뱀파이어 다이어리라는 미드를 보면, 십대 후반 가장 젊고 아름다운 나이에 뱀파이어의 '저주'에 걸려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고, 병에 걸리지도 않고, 인간보다 빠르고 민첩한 체력을 가진 채 영생을 살게 된 주인공들이 나온다. 뱀파이어가 되는 것이 '저주'인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피를 갈구하게 된다는 점인데, 초기 시즌들에서는 여러 메인 캐릭터들이 인간에서 뱀파이어로 변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점을 엄청난 고난과 역경처럼 그려놓았다. 하지만 처음 적응기만 지나고 나면 그 뱀파이어들이 마치 콜라를 마시고 포테토칩을 먹듯이 자연스럽게 의료용 혈액주머니에 빨대를 꽂아 피를 마시며 아주 잘만 살아가는걸 볼 수 있으니, 인간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딱히 '저주'라고 부를만한 건 아닌 듯 싶다.
드라마에서 뱀파이어들은 대체로 뱀파이어로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여자주인공 엘레나 한 명을 빼고는 말이다. 그녀에게야말로 뱀파이어가 된다는 건 정말로 '저주'이다.
뱀파이어는, 임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엘레나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원히 늙지 않아도 되고, 미친듯이 섹시한 남자가 자기만을 사랑해주는데도, 그녀는 뱀파이어보다 인간이기를 바란다. 아이를 갖고, 가족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이어야 하니까.
한창 즐겁게 미드를 정주행해놓고 이제와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사실 나는 이 스토리의 이 설정에 꽤 짜증이 나고 속상했다. 뱀파이어보다 인간이 나은 점이 아기를 갖고 가족을 만들 수 있다는 거라고? 그건 마치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하면 당연히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말처럼, 아기를 가져야 비로소 진정한 가족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들렸다. 영생을 포기하고 어렵게 다시 인간이 되었는데, 알고보니 나처럼 난임이면 어떡할거냐고.
2.
며칠 전, 점심 식사가 몸에 받지 않았던지 오후의 사무실 화장실에서 모조리 속을 게워내어야 했던 날이 있었다. 일을 하면서도 계속 속이 답답하여 가슴을 두드리던 차 책상 앞에서 한 번 헛구역질이 나왔고, 급히 화장실 빈 칸으로 뛰어 들어가서 여러 번 토했다.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심하게 고생을 한 후 겨우 추스리고 칸 밖으로 나왔더니,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던 여자 선배가 씩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너, 좋은 소식 있지? 라며. 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선배였지만 그 순간 얼마나 원망스러웠던지. 그 날 나는 한창 몸도 약해지고 예민해져 있던 생리 2일 차였다.
그 다음날에는 아침에 출근하자, 삼 년전 같은 팀에서 근무했던, 지금은 옆옆옆팀의 여자 선배가 갑자기 나에게 팔짱을 끼더니, 나를 휴게실로 끌고 갔다. 예상치 못했던 스킨십에 영문을 몰라 하고 있던 나에게 그녀는 팔짱을 푸는 대신 내 팔을 꼭 잡고 축하해! 라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전날과 똑같이 - 단순히 체했을 뿐이며 지금 생리 중임을(혹시라도 지금 임신일 가능성은 없음을) 애써 웃으며 설명했다. 그냥 그렇게 웃고 넘어가면 되는 오해이고, 해프닝인 것처럼. 그녀들은 내가 일년 째 시험관 시술 중인 걸 모르고 있으니까. 괜히 분위기 심각하게 만들 것 없이.
난임 일기를 쓴다는 건 나에게는 무척이나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다. 내 몸이 쉽게 임신이 되지 않는 몸이라는 건 창피해야 할 일도, 웅크러들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타인에게 마음 편히 공유할 수 있는 사실도 아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사회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건 전혀 다른 일이라, 나는 나의 난임을 떳떳하게 받아들이지만, 당당하게 드러내기가 어렵다. 노브라로 길거리를 활보하는 게, 나로서는 아직 어려운 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난임 일기를 쓰기로 했고, 난임을 겪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부부가 아이를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라는 걸 - 아이를 갖지 않기로 선택했을 수도 - 사실은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는 중일 수도 있다는 걸 -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결혼한지 삼 년 째라고 했을 때 자연스러운 수순인 양 아기 계획을 물어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합리적이고 깨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임신'에 대해서는 쉽고 당연한 일로만 생각하고 있는지 매일 새삼 깨닫고 있는 난임 삼 년차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