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레바람 Oct 22. 2019

임테기 한 줄을 확인하는 날에는 시집을 꺼내요

난임 일기. 시험관 6회차, 내가 시를 읽는 이유

나는 지금 2년째 시험관 시술을 진행하며 아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곧 세상에서 가장 형이하학적인 일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 그러니까 아기의 똥기저귀를 갈아주고, 수면 부족과 싸우며 저린 팔로 아이를 안고 수유를 하거나, 야채를 잘게 갈아 이유식을 만드는 일들 말이다. 나라는 존재를 잠시 묻어두고 하루 종일 아기에 집중하며 체력적인 한계를 매 번 갱신해야 하는 일, 지구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렵다는 그 일을 나도 겪어보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다.


동시에, 지금이 나에게는 아직 아이가 찾아오지 않은 덕에 주어진 가장 자유롭고 나다울 수 있는 시간임을 인지하고 있다. 난임 생활을 견디고 여유 시간을 누리기 위해 나는 시를 읽기로 선택 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있어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형이상학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에 대해 뭐도 모르는 나에게, 문학과지성사나 문학동네, 창비에서 나오는 시집들을 읽는다는 건 한가로움의 상징처럼 보였고, 내가 아이가 아직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 같았다. 주말에 남편과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다시 낮잠에 빠져드는 일처럼.


나는 곧바로 시에 매료되었다. 시인들이 한국어를 나열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은 무한해 보였다. 시인들은 문단과 문장을 가지고 놀았고, 단어들을 세심하게 골라내었으며 신중하고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띄어쓰기와 줄 간격을 결정했다. 언어로 하얀 종이를 색칠한 시인들은 가장 친숙하고 일상적인 사물들을 낯설게 만들었던 르네 마그리트를 떠올리게 했다.


시를 읽다보면 가장 쉬운 한국어 단어들이 종종 나를 배신했다. ‘개’나 ‘하늘’, ‘밥’과 같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소재를 다룬 글들을 이해하지 못해 한 페이지에서 몇 분이나 머무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배신당하는 느낌이 좋았다. 시의 호락호락하지 않음에 매력을 느꼈다. 오히려 너무 쉽게 읽히면 곤란했다. 시를 읽는 건 나니까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다 깨서 우는 아기도, 놀아달라고 보채는 아이도 없으니 오래 동안 글자들을 노려볼 수 있었다.


시험관 시술 후 임테기로 한 줄을 확인한 날이나, 피검 후 비임신이라는 결과를 전달받았던 날에도 나는 책장 속에서 시집을 꺼냈다. 남들에겐 참 쉬워만 보이는 일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내가 여기서 더 어떻게 해야 아기가 찾아와줄지. 5분마다 나를 비관하고 청승을 떨기에 산문의 호흡은 너무 길었다. 멍한 얼굴로 평균 두 페이지 안에 한 편이 끝나는 시를 읽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에는,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가 딱이었다.


여전히 나에게 시는 어렵다. 읽을 때마다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계속 뜬구름만 잡으며 헤매도 초조해지지는 않는다. 계획보다 길어진 난임 여정 중에 깨달은 게 하나 있기 때문이다. 시는 여유롭고 한가로울 때 읽기도 좋지만 가장 바쁠 때 읽기도 좋다는 점이다. 시 한 편에 보통 한두 페이지 정도니까, 평균 1분 안팎으로 완성될 수 있는 가성비 최대의 유흥이다. 언젠가 아이가 낮잠 자는 틈에 겨우 시 한 편을 읽으며 ‘그래도 임신 준비하며 맘껏 시 읽던 때가 좋았지’라고 할 날을 기다린다.

이전 01화 내가 엄마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