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냉이의 저주
*이차령 사진전 '꿈 VISION'에서 이차령의 친구 '주로출판사'가 쓰고 디자인한 '주보'를 선보입니다. 저는 여기에 '미래를 위한 명상록'이란 제목의, 파란 사진을 찍는 사진가 이차령과 파란 표지를 한 데버라 리비의 에세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동시에 곱씹으며 쓴 글을 싣습니다.
미래를 위한 명상록
요즘 자꾸 옛날 이야기를 해요. 어느 술자리에서 이차령이 내게 한 말이다. 그는 최근 막걸리에 빠져 있다. 나는 주기적으로 술을 끊는다. 막걸리에 빠진 이차령은 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는데, 그게 좋아 보여 나도 종종 채식 메뉴를 준비한다. 그를 따라 온전히 비건으로 식습관을 바꿔 보고 싶지만 아직은 관성대로 사는 중이다. 그래도 고기 요리 사진을 SNS에 포스팅 하는 건 멈췄다. 거의 멈췄다. 술도 대충 끊고, 고기도 대충 줄이고, 고기 사진 포스팅은 거의 멈추고. 술을 끊자마자 마시고, 숙취에 시달리고도 또 취하고. 대체 뭔가를 완벽하게 해 내는 때는 언제 올까. 오긴 올까.
그러니까, 요즘 자꾸 옛날 이야기를 해요. 저녁 8시경 동네 위스키 바에서 이차령이 말했다. 나도 그래요. 내가 대꾸했다. 술을 적게 마시고 막걸리를 좋아하는 이차령과 술을 많이 마시고 때때로 진 없는 진피즈를 주문하는 내가 나란히 앉았다. 단 한 명의 바텐더가 레몬을 자른다. 이 바의 주인인 바텐더를 처음 만난 곳은 제주 음식에 소주를 파는 술집이었다. 자정이 다 돼 가는 시각에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가게 한복판에 우두커니 야자수 나무가 한 그루 화분에 심긴 채 서 있었다. 야자수 옆 테이블에서 친구들, 처음 보는 이들, 어색한 사이의 사람들이 다함께 왁자지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 빼고 모두가 취해있었다. 흔치 않은 일이라 어리둥절 했던 기억이 있는데, 아무튼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한 명의 바텐더가 있는 이 작은 바의 단골이 되었다.
방금 내가 '기억이 있다'고 했나? 다시 말해, 옛날 이야기를 꺼냈나? 하지만 따지고 들면 이건 순전히 지난 일을 언급한 것일 뿐, '옛날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언젠가 논현동의 이름 없는 작은 주점에 갔다, 고 하면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단순 발화에 그친다. 반면 그날 만취한 내가 영업 마감 중인 주인을 붙들고 날 사로 잡고 놔 주질 않는 죽음에 관한 한 가지 생각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며 떠들어 댄 일을 상기하기 시작한다면 그건.. 그래, 이것도 지나가는 말인 걸로 해두자.
실은 이차령에게(만) 털어놓은 적 있다.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는 이야기. 앞서 떠올리고야 만, 술집 주인에게 사뭇 진지한 양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한 약간은 수치스런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죽음에의 불안, 절망과는 다른 이야기. 훨씬 더 무서운 마지막 한 가지 이야기.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 잠든 내 멱살을 잡아 기어이 깨우고야 마는 공포에 관한 이야기. 무엇보다 유독하고 주머니 속 알약 봉지처럼 나와 함께 여기저기를 다니는 이야기. 그러니까 이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차라리 미래에 대한 예언이다. 지금도 내 곁에 도사리고 있는 이... 그러니까... 이 '무언가'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 같은.. 저주와... 슬픈 결말과...
미래를 그리는 일이 의아하게 여겨진다. 사람들의 희망적인 말들이 의심스럽다. 모든 희망찬 계획엔 실패가 빠져 있다. 구체적인 계획엔 구체적인 실패가 빠져 있고, 추상적인 계획엔 모든 것이 누락되어 있는데, 한편 우리는, 미래를 실패할 계획인 우리는, 미래에 절망했다고 옛 이야기로 돌아가지는 않을 사람들이다. 과거를 말하기 위해선 어둠과 아픔과 신경증과 폭력이, 이름을 입에 올리면 뼈와 살과 근육을 가지고 회귀할 것만 같은 무엇들이 멀리 도망 온 과거로부터 해일처럼 밀려올 거라 믿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야자수보다도 더 안쪽에 서 있기로 했던 것인데, 그러면 흐리고 납작한 세상을 창문 너머로 바라나 보는 안전 지대에 속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인데,
과거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도
과거가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 중, 데버라 리비)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러운 우리에게 묻고 답한다. 나이 들어 보이기 때문에 과거를 꺼내기 부끄러운가? 우리는 언제나 이전보다 늙었다. 내세울 만한 찬란한 추억이 없어서 그러한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찾아오지도 않은 전성기조차 지나가 버린 것처럼 여겨지는가?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편이 빠를 것이다. 이 모든 답안을 성실히 외운들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법을 우린 학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슬픔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며, 동시에 슬퍼하지 않고는 과거를 이야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슬픔이 부끄러운 우리는 어두운 곳으로 가자. 하지만 적당히 어두운 곳으로 가자. 높은 곳으로 가자. 하지만 뾰족하지도 정상도 아닌 곳으로 가자. 멀고 외로운 곳으로 가자. 날 지켜보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을 그곳으로 가자. 그곳에 서서 차라리 더 먼 옛날을 바라보자. 작고 어둡고 흐린 옛날을 바라보자. 찍고 확대하고 자르고 펴서, 불안과 공포를 응시하는 나를 응시하는, 망상과 절망과 수치와 비관의 언덕에서 나를 바라보는 과거를 바라보자. 과거는 우릴 잊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은 나도
아무것도 잊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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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6. 25 - 7.4
@무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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