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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Apr 18. 2018

페미니스트 딸이 아빠에게 느끼는 부채감에 대하여

싫으면 집 나가면 되겠네

 아빠는 최근 30년간 해오던 인테리어 사업을 접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동종업계 지인을 통한 수주를 기대해 새로운 사업을 차렸지만, 가격이나 공급량의 문제로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느 날 아빠는 사업이 여의치 않으니 나에게 온라인 홍보 채널을 분석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마케팅 전문가도 아니고 어렵다고 했으나 아빠는 “어차피 너는 백수고 내가 돈도 주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말투로 막무가내였다. 손 글씨로 본인의 사업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적은 제안서를 주며 여기 설명이 다 되어 있으니 문제없다는 식이였다.


 페미니즘을 배우면서 나는 아빠와의 관계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고 느꼈다.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라는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을 덜 하게 되었고, 남성성을 배우면서 가장으로써 30여 년을 지내온 아빠를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나는 여전히 힘들어했다. 도대체 아빠의 어떤 말이, 나의 어떤 생각이 힘들게 하는 걸까.      


 나는 정말 거절하고 싶었다. 이전의 경험들 속에서 일의 효율성은 물론 일의 과정, 결과 모두가 좋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가장이 느끼는 불안함과 절박함은 느껴졌기에 아빠를 위로하고 도와드리고 (물론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싶은 마음은 있다. 딱 그 정도 마음 이였으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 문제는 더 크고 깊게 다가왔다.      


 나는 우리의 대화가, 나와 아빠라는 두 사람의 대화가 아니라, 가정의 ‘대표자’-아빠와 ‘종속인’-나 의 대화라고 느껴졌다. 아빠는 물론 의도하진 않았지만, ‘백수인데 돈 줄 테니 이 일이나 해라’는 말은 ‘집에 경제적 보탬이 되지 않는 너는 우리 집의 부양자인 내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하지 않니? 내가 못 벌면 너는?’이라는 맥락으로 들렸다. 만약 아빠가 ‘도와달라’ ‘부탁이다’라는 서술어를 썼으면 달랐을 것이다. 


어릴 적 아빠는 나와 동생이 자신의 말을 안 듣거나 의견을 달리 하면 이렇게 말했다.     


싫으면 집을 나가면 되겠네. 나가서 마음대로 살아.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들으며 나는 ‘아빠는 언제든지 나를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그런 아빠를 사랑했지만 좋아하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으면 내가 춥고 가난해질 거라고 협박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우리는 가족이 정서적 유대관계로 묶여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서로를 사랑해서, 너무 사랑해서 가끔 어긋나는 거라고, 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의 가족은 철저히 경제적 이해관계로 묶여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유용성(경제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다. 돈을 못 벌어오면 아빠가 아니고, 밥을 안 해주면 엄마가 아니고, 공부를 못하면 혹은 늙은 부모를 돌보지 않으면 자식이 아니고, 늙으면 자식에게 피해 안 주게 빨리 죽어야 하는 노인들* 


한국 가족은 왜 ‘사람에 토대를 둔 가족’으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정의 조건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에 토대를 둔 가족, 혹은 관계 그 자체가 중요한 가족- 의 구조는 우정의 구조와 비슷하다. 관계 속의 개인들이 서로를 도구화하지 않고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인 관심을 관계 바깥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관심이 가운데 놓이자마자 관계는 복잡해지고 불안정해진다. 마음이 돈으로 환산되고, 돈이 마음을 대신하며, 함께 했던 시간 전체가 투자, 기대, 이익, 손해, 청산 같은 경제 용어로 기술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경제적인 약자들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가족이라면, 경제적인 관심을 가족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 
-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지음, 문학과 지성사 p188 발췌 


 이 글을 읽고 지난 20여 년간의 나와 아빠의 대화를 생각해보았다. 아빠는 나에게 '농담'으로 말을 걸곤 했는데 나에게 이 말들은 농담이 아니었다. 아빠의 농담은 그 나이 때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성과들을 말하고 있었기에 나는 늘 부담이 되었다. 


"이번 시험은 잘 봤니?"

"대학 등록금 우리가 대주는데 이 정도 말도 못 하니?"

" 너 어디에 취직할래"

"이번에 우리 기념일에 얼마 보태줄 거니?"


나와 아빠가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 사람 대 사람으로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우리가 서로에게 종속되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나도 아빠를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나와 내 주변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상상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 그 날이 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잘 견디기 위해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같다.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지음, 문학과 지성사 p188 발췌 내용을 각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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