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걸음
[아 또야!?..]
필름현상소에 다 찍은 필름을 맡기며 직원과 대화를 나누곤 깨닫는다.
'아.... 칼라 필름으로 찍은 줄 알았는데 흑백필름이었어?'
카메라가 여러 대이다 보니 한동안 안 쓰던 카메라에 이미 들어있던 필름이 칼라인지 흑백인지 몰라 일단 현상을 해봐야 아는 경우가 발생한다. 뉴욕은 도시 고유의 색상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흑백 사진을 선호하진 않지만, 때에 따라 결과물이 흑백으로 나온 경우엔 이렇게 뒤통수를 맞은 느낌으로 현상소를 나서곤 했다.
하지만 과거에 그 카메라에 흑백 필름을 넣어놓은 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기에 누군가 탓을 하자면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오로지 나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흑백사진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나에게 인생의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게 매사 철저히 준비해야 뒤통수 맞을 일이 없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흑백 사진을 싫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흑백사진은 그만이 주는 특별함이 분명히 존재한다. 오히려 색상이 있을 때 보다 없을 때 작가가 사진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명확해지고 사진의 힘이 강해질 수도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는 개인적인 견해로 사진작가 랄프 깁슨 Ralph Gibson이라고 생각한다. (흑백사진의 정수를 보고 싶으시다면 그의 작품들을 추천한다.) 그가 의도적으로 흑백사진을 이용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철저히 우연에 올라탄 결과로써 종종 흑백사진을 마주해야 했지만 그것이 또한 필름사진 자체의 예측불가능한 매력이기도 했다. 어떤 필름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긴장감과 기대감은 필름사진을 더욱 매력 있게 만들어준다. 비단 흑백사진뿐 만 아니라 필름사진 자체는 예측의 범주에 들어있다기 보단 항상 운의 범주에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날도 카메라 안에 들어있는 필름이 흑백필름인지 모른 채 열심히 뉴욕 거리를 돌아다니며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현상소를 나서며 또 흑백필름이었구나를 깨닫곤 다소 힘이 빠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흑백사진보단 칼라사진을 더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 사진이 만약 칼라사진이었다면, 그래서 만약 이미지를 비추는 창의 푸르스름한 색상이, 회색 아스팔트 길이, 사람들의 알록달록한 옷 색이 사진 속에 전부 들어있었다면 강아지에게 충분한 시선을 줄 수 있었을까? 웃으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유모차를 끌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쳐다보며 가게 앞에서 보호자를 기다리는 불독의 툭 튀어나온 아래턱과 이빨이 웃음 포인트가 될 수 있었을까?
때론 과한 것이 부족한 것보다 못할 때가 있다는 걸 나는 흑백사진 작업을 통해 깨닫곤 했다.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존재해 그것이 모든 것을 흩뜨려놓아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 없을 때, 그럴 땐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흑백사진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필름카메라로 찍는 흑백사진은 마치 인생을 배우는 일과도 같았다.
그리고 흑백사진이 내게 알려준 마지막 교훈은 후회해도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어떤 사진은 (예를 들어 위와 같은) 흑백일 때 보다 컬러일 때 더 돋보일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사진 속 주인공이 그곳에 서있던 순간, 내가 그들을 향해 셔터를 누른 그 순간 카메라에 들어있던 것은 흑백필름이었다. 이미 흑백사진으로 찍힌 것을 아쉽다 하여 컬러로 바꿀 방법은 없는 것이다. (아, 물론 요즈음은 ai로 흑백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바꿀 수 있긴 하다.) 어쨌거나 그마저도 품이 드는 일이니, 후회 같은 쓸데없는 마음은 내면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줄 뿐 하등 쓸모가 없다. 그렇기에 단 한 번의 찰칵 소리에 나는 매번 온 마음을 담았던 것 같다.
값비싼 필름을 아끼기 위해 매 컷을 소중히 하나하나씩 찍어나가는 일은 내겐 약간 제사를 지내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나가는 강아지들이 잠시 걸음이 느려질 때를 기다렸다 찰칵. 이건 나름의 전을 부치기 위한 과정과 같다. 카페 창밖너머로 네댓 마리의 강아지를 이끌며 걸어가는 도그워커를 향해 또 찰칵. 이건 마치 배와 사과 등을 깎는 행위와 같다. 그리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간신히 한 손으론 우산을, 한 손으론 카메라를 들어 보이곤 또 찰칵. 이제 제사상에 올릴 지방을 정성스럽게 써내리고나면 향로에 향을 올린다. 절을 하고, 향을 올리고를 반복하는 일은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용액을 흔드는 행위와 같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매해 친척집에 가 제사음식을 정성스레 차리고 또 정성스레 절을 올리던 어른들의 모습은 내가 필름사진을 대하는 태도와 닮아있었다. 숭고하고 고상하면서도 또 진지하고 진심인 그런 태도와 자세랄까.
뉴욕사람들에겐 당연한 반려견 산책문화를 진지하게 전하는 일은 조상을 잘 모시는 것만큼이나 내겐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진 안에 담긴 네발 친구들의 발걸음은 한없이 신나고 들떠있지만 그들을 대하는 카메라 건너의 나는 마치 제사상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매 순간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나에게 이 프로젝트가 굉장히 소중한 이유이다.
제사상을 준비하는 것 과 같은 숭고한 일을 찰나의 순간을 수천번 담아낼 수 있는 최첨단 기술이 접목된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매초마다 고민하고 고민해 비로소 한컷을 누를 수밖에 없는 고상한 필름카메라와 함께였음에 감사하다.
비용은 꽤 들었지만,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