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걸음
나는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마라와 걸었을 뿐인데, 다시 나의 삶에 대한 애착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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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나는 애초 나의 계획과는 다르게 곧장 한국으로 귀국했다. 부모님이 한국에서 카페를 막 오픈하신 참이었고, 외동인 나는 자연스럽게 선택의 여지없이 부모님의 사업을 도우러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뉴욕의 생활을 좋아했으므로 나는 물론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부모님의 사업을 도우며 1년 반을 보내는 동안 나는 클로이가 느꼈던 슬픔의 반의 반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마음 병을 앓았다. 갑자기 돌아온 만큼 꽤나 낯설어진 한국의 공기에 나는 잘 적응하지 못했고 평생을 예술학도로 살아왔기에 갑자기 주어진 업무들 또한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들을 매일 반복하다 보니 자아에도 큰 혼란이 왔다.
그리고 마치 이미 예견되어있던 결말처럼, 어느 날엔가는 우울 감이란 괴물이 내게 찾아오고야 말았다.
[네가 원하던 삶이 이거야? 정말 이렇게 살려고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어? 이렇게 살 거면 뭐 하러 살아. 그냥 다 놓아버려.]
괴물은 나에게 매일같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해댔다. 그리고 어느 날엔 가는 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친구 하나를 데려왔다.
[소개할게, 여긴 내 친구 공황장애야.]
평생을 예술학도로 살아왔던 한 인간은 그렇게 1년 반이란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고 싶다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한 채 마음속에 두 괴물을 품게 되었다.
그것들은 진득하니 내 안에 자리 잡아 마치 영원히 내게 들러붙어있을 것 만 같이 굴었다.
매일 12시간 이상 카운터 앞에 서서 나는 내 안의 두 괴물과 맞서 싸웠다. 앞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괴물들의 존재를 털어놓을 수 없을 거란 사실과 언젠가 괴물에게 먹힐 날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잠식해 갔다. 카페에 나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직원들과 인사하고 손님을 맞이하다 보면 어느 순간 공황장애가 예고 없이 찾아오곤 했기에 나는 매일 밤 내일 아침 눈을 뜨지 않길 바라며 잠에 들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해는 뜬다는 말을 그때만큼 뼈저리게 애석하게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해는 뜨고 아침은 찾아온다. 정말이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사실이다. 아침에 눈을 떠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때면 침대에 누워 한없이 애먼 손목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르고 아프지 않은 방법으로 죽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데일 카네기가 쓴 #인간관계론 에는 이런 말이 등장한다. [사람은 각박한 현실에 치여 자신의 중요감을 상실했을 때 환상의 세계에서 만족감을 얻기 위해 정신을 놓아버린다.] 나는 아마 그가 설명한 것처럼 정신을 놓아버리는 지경까지 갈 만큼 자아를 상실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이 서른에 11044.928km 나 떨어진 뉴욕으로 가출을 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나를 제정신으로 붙들고 있게 도와주었던 건 다행히 아직 뉴욕에서 내가 다시 돌아오거나 혹은 놀러 오길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의 편지와 메시지들이었다. 클로이도 아직 뉴욕에 남아 마라와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었다.
[모리, 언제 와 대체? 금방 온다더니, 아예 가버린 거야?]
우리는 자주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서로의 텅 빈자리의 부재는 좀처럼 매워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호등 앞에 서있는데 예고도 없이 당장 차에 치여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온 뇌를 지배하는 순간이 불쑥 찾아왔다. 한 발자국만 나가면 도로였다. 하지만 나는 감히 발을 내딛지 못했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나 겁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나는 증오했다.
집으로 돌아와 어쩌면 없었을 수도 있었을 ‘지금’을 생각했다. ‘지금’ 내가 살아있지 않았을 수도 있는 확률. 내일 아직 살아있을 확률. 내일모레 내가 아직 세상에 존재할 확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당장 죽는 것보다 내일도, 내일모레도 똑같은 상태로 계속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은 이 삶이 너무나 무서웠다. 조만간 마지막 제정신일 것 같았던 그 짧았던 순간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정신없이 뉴욕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렇게 나는 살기 위해 다시 뉴욕으로 떠났다. 아마 그때 그 마지막 기회를 잡지 않았더라면, 이 글은 영영 쓰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
1년 만에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 기분은 좋았지만 또 한편으론 그렇지 못했다. 말이 좋아 ‘돌아왔다.’인 거고, 사실은 가출이었다. 내가 뉴욕에 도착한 이후 한참 동안 어느 누구도 내가 뉴욕으로 돌아갔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뉴욕에 가능하면 최대한 오래 머물며 나를 죽이던 모든 것들과 떨어져 있으려던 생각이었으므로 나는 그곳에서 심각하게 돈을 아껴 써야만 했다. 일주일 단위로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다녔고, 물론 모두 흔쾌히 거실의 소파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불편한 매일을 보내야 했다.
매 순간이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클로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른 애들 집에 있지 말고 그냥 우리 집으로 빨리 와. 오래 묵는 게 걱정인 거면 와서 마라 좀 산책시켜 주던가. 난 네가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좋아.]
매일 일을 하러 나가는 본인 대신 집에서 마라와 시간을 좀 보내 달라며, 산책을 해주는 대신 얼마든지 묵어도 좋다는 클로이의 말은 마치, 네게 평온을 주겠노라- 하는 신의 계시와 같이 들려왔다. 하지만 유학시절엔 그렇게나 하고 싶었던 도그 워커의 일도 이제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을 차마 그녀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말했다시피 당시 나는 꽤 짙은 우울감에 빠져 있었고 죽지 않기 위해 뉴욕으로 도망쳐 나와있었다. 개를 산책시킨다는 행위는 당시 나의 상태를 고려해 보았을 때 그다지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마라는 매일 산책 나가던 시간이 다가올 때면 항상 나를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대체 언제 나갈 생각이야? 벌써 일곱 시라고.]
그래, 가자- 다소 무겁고 뚱한 몸짓으로 나는 안 그래도 추워서 이불 밖으로 나서기 싫은 마음을 억지로 부여잡고 그저 신이 난 마라와 함께 밖을 나섰다. 왜 하필이면 난 겨울에 가출을 해야만 했을까. 긴 패딩을 껴입고 큰 건물들 사이로 대차게 불어대는 바람을 맞아가며 나는 마라와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걷는 동안 마라와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그저 걸었을 뿐이고 귀찮음 외에는 어떠한 감정도 잘 느끼지 못했다.
문제는 개들은 본인을 좋아하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을 귀신같이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산책을 나서기 귀찮았는지 마라도 분명히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당시 써 놓은 일기장에 이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날 바라보는 마라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저 무말랭이 같은 인간..!]
학업에 지친, 혹은 업무에 지친 거대한 인간 떡이 버스에 앉아 그야말로 떡실신이 되어있던 옛날 TV광고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광고와 같이 거대한 무말랭이가 작은 강아지에게 이끌려 뉴욕 거리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장면을 떠올린다면 딱 그 모습이 당시 나의 모습일 것 같다.
우리의 산책은 그다지 신나지 않았다. 그저 동네 몇 바퀴를 돌고 나면 마라는 매번 같은 자리에 배변활동을 했고 그것을 치우고 나면 우린 집으로 돌아갔다. 매일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무말랭이보다도 더 건조하게 끝이 나버리던 산책이었지만 마라는 그 마저도 좋았던지 돌아와서는 나에게 꼬리를 신나게 흔들어 대며 좀 더 놀아 주기를 기대했다. 나는 여전히 모든 게 귀찮은 심리적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라 때문에 억지로 밖을 나서야 했고 걸어야 했으며, 또 돌아와서는 공놀이를 함께 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결국 고작 삼 십분 남짓 되었던 이 산책이 매일 반복되는 과정에서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머, 귀여워라. 강아지가 정말 귀엽네요.]
[뉴욕에서는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종이 뭐 에요?]
[이름이 뭐 에요?]
[우리 집 개도 얼굴에 반점이 있어요.]
사람들은 마라를 보며 무말랭이처럼 걷고 있던 내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말들을 건네 왔고 때로는 그 대화가 끊이지 않아 한참을 거리에 서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매일 자기 전 눈물로 보내야 했던 날들은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점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지나자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아도 잠을 깊이 잘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클로이가 늦을 때면 마라와 길을 걸으며 만나는 뉴욕의 수많은 사람들의 친절함은, 이 세상을 등지기엔 아직 좀 아쉬운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당장 통장의 돈을 걱정해야 했지만 웬일인지 나는 더 이상 우울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밤에 산책을 나갈 때마다 마주치던 숨 막힐 것 같던 고층 빌딩들이 발하는 빛들마저 아름다워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나는 변화한 나의 모습을 보며 언제 까지고 이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운명이기는 했지만 당시 나의 희망사항은 그랬다.
그러니 내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바로 강아지를 입양한 것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마라와 뉴욕의 반려인들, 그리고 그들의 네발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매일 뉴욕의 거리를 걸을 일도, 수많은 행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들 일도,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갈 용기도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저 마라와 함께 걸었을 뿐인데, 다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