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걸음
미국의 노숙자 문제는 복잡하다. 내가 살았던 뉴욕에도 길거리 위나 지하철 같은 곳에서 노숙자들을 자주 만나 볼 수 있었다. 지금이야 얼마나 더 많아졌을지, 혹은 (아니겠지만) 줄어들었을지 모르겠으나 2010년대 후반 당시에는 몇 블록을 걸으면 꼭 한 명씩은 노숙자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그 중 반려동물을 키우는 노숙자의 수는 약 10명 중 한 명꼴은 되었던 것 같다. 처음 한두 번 그들을 마주쳤을 땐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곤 하였지만, 한 두 번이 세 번 네 번이 되고 예상외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노숙자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땐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저들은 왜 반려동물을 키우는 걸까?'
'밥은 제때 챙겨주고 있는 걸까?'
'저 반려동물들, 행복할까...?'
그들을 마주칠 때 마다 의문의 구름들은 끝도 없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어느날은 나의 사진 프로젝트를 잘 알고 계시는 학교 교수님께 이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교수님, 뉴욕에서는 노숙자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한 반감은 없나요? 합법적으로 노숙자가 반려동물을 키울 수 있게 되어있는 거예요?]
[물론이지. 반려동물을 키우는 건 그들의 자유야.]
[그럼 그들을 걱정하거나 이런 현상을 우려하는 사람이 없는 건가요?]
[글쎄, 하지만 종종 반려동물을 구걸할 때 이용을 하려는 목적으로 키우는 나쁜 사람들이 있기는 해. 그들과 함께 있으면 사람들은 더 동정을 느끼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노숙자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 자체를 막을 이유는 없다고 봐.]
순간 말문이 조금 막혔다. 헌법 제1조에 '개인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살다 보면 때때로 '아- 여기 미국이지' 하는 순간들이 불쑥 찾아오곤 하는데,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게 되었던 것 같다.
이곳 뉴욕 사람들은 노숙자들이라도 돈을 벌 능력은 없으나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에 대한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자활 능력이 없다고 한들, 그것이 본인의 자유를 앗아갈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물을 키우는 것도 그들이 원한다면 당연히 키울 수 있다. 게다가 여긴 평범한 삶을 살다 갑자기 노숙자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많아 키우던 반려동물과 함께 거리로 나서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덧붙여 그렇게 거리로 나서게 되었지만 반려동물과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노숙자 쉘터가 부족해 거리 위의 삶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렇지만 돈도 없는데.. 만약에 반려동물이 아프면 어떡하지...?'
'매서운 겨울날씨엔 또 어떻게 버티냔 말이야...'
뉴욕에 있던 당시에 나는 반려견이 없었으므로(전 편에서 언급한 세마리의 대형견은 부모님의 반려동물이었다.) 당연히 위와 같은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반려견을 위해 입양을 보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반려동물을 키울 수 있는 '자격'에 대한 논의는 따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나...?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후 반려견을 입양해 삼 년째 키우고 있는 현재의 나는, 과거 나의 저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마음이 된 지 오래이다. 반려인이 반려인을 이해한다랄까. 내가 당장 내일 거리에 나앉는다고 해서 나의 반려견을 입양 보낼 수 있을까? 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옆에 두고 최선을 다해볼 것 같다.
그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노숙자 여성을 만났다. 벌러덩 드러누운 커다란 퍼그의 다리를 붙잡은 여성의 손에는 발톱깎이가 들려있었다. 다소 웃음이 나오는 장면에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으려는데 길을 가던 다른 여성이 노숙자에게 다가왔다. '돈을 주려는 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보니 여성이 건네주는 것이 돈이 아닌 다른것이란걸 깨달았다. 먹을 것이었다.
[강아지랑 드세요.]
이 한마디를 남긴 채 여성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노숙자는 떠나는 그녀의 등을 보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이처럼 그들의 반려동물을 걱정하는 이들, 나처럼 반려동물권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 혹은 동물단체 사람들은 거리에서 사는 반려동물들을 그저 두고 보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의 오늘이 배부를 수 있도록 돕고, 단체 같은 경우는 실제로 노숙자에게서 반려동물을 구조하기도 한다. 이는 국내외에서 모두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개인의 자유가 우선시되는 사회인 그곳에서는 반려동물을 뺏긴 노숙자들이 단체로 동물권 단체를 소송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게 조금 다른 점일 것 같다.
진정 반려동물을 사랑해 포기할 수 없는 것인지, 혹은 그저 이용하기 위한 것인지는 노숙자 본인만이 알겠지만 어쨌든 보호자가 있는 삶이 길거리에 버려져 떠도는 삶 보단 낫지 않을까 라는 확신 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지금껏 뉴욕에 몇 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떠돌이 개를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 또한 혼란스러운 마음에 무게를 더했다.
자유가 있지만 종일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삶과 비록 자유는 없지만 길거리에서 나마 보호자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사는 삶. 어느 삶이 더 낫다는 정답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는 좀 더 다양한 측면으로의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한국과 미국, 어디에도 노숙자가 반려동물을 기르면 안 된다는 법이 없기에 그렇고, 실제로 사람들의 동정을 이끌어내려는 목적으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노숙자들도 존재하기에 그렇다. 그리고 길거리를 떠도는 반려동물들의 수는... 말해 뭐 하겠나.
반려동물을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도, 노숙자의 반려동물에 관한 법도, 모두 개정되길 바라며 더불어 뉴욕에서 만났던 반려동물들과 함께였던 노숙자들이 지금은 모두 지붕이 있는 집에서 각자의 반려동물과 안락한 삶을 살고 있길 바란다. 지나가던 동양인 여자애 하나가 1달러를 건네며 사진을 찍어도 되냐 물었던, 식탁에 앉아 따뜻한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그들의 옆에 각자의 반려동물들이 함께이길.
그들의 삶이 진심으로 행복하고 안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