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일 차, 대성당 향로 의식의 감동
수녀님은 노래를 부르셨고,
향로가 향을 피우며 대성당 끝에서 끝으로 크게 움직이던 그 순간,
‘드디어, 드디어, 내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와 있구나.’ 생각하는 순간,
내가 이곳에 왜 왔는가 하는 이유가 선명히 다가왔다.
지금은 대성당에 와있다
점심때 미사를 봤는데 이 저녁 다시 성당에 앉아있다.
아마도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순례자로서의 마음가짐은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어서,
그 마음 좀 더 간직하고 싶어, 성당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저 앉아있고 싶다. 그저 그러고 싶다.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걸으며,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워낙에 나이가 들면서 잘 잊어버리곤 해서, 기록을 하고자 애를 썼다.
그러면서 돌아보니 내가 참 많이 쓴 단어가 있다.
“그저”
라는 단어다.
그저 걷는다. 그저 그러고 싶다.
그저 만난다. 그저 친절하고 싶다.
이유가 없다. 난 순례 길을 걸으면서, 뭐 딱히 거창한 목표도 거창한 이유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사실, 그럴 의지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그저 그렇게 뭔가를 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참 가볍다.
아침 일찍 잔과 캐시 그리고 유리와 함께 아침을 먹고 잔을 떠나보냈다
아침에는 어제 먹으려다 시간이 늦어 못 먹었던 추로스와 핫초코를 먹기로 했다.
초콜릿이 무척 진하고 따뜻했다.
정말로 핫초코의 진수를 경험한 것 같았다.
잔은 씩씩하게 떠났다.
멋진 청년으로 훌륭하게 성장하길 기도한다.
이어, 유리와도 헤어졌다. 유리는 내일부터 또 도보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알베르게를 알아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끝까지 그녀의 남은 도보가 안전하고 의미 있길 바란다.
이어서 캐시와 함께 알베르게를 알아봤다.
나는 내일 묵시아로 가는 버스를 타고 묵시아로 떠나기로 했다.
캐시는 바로 피스테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시외버스 정류장과 가까운 곳에 오늘의 숙소를 정하고 12시 미사를 함께 드렸다.
30분 전에 도착했는데도, 대성당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본 미사에 앞서 페레그리노들이 얼마나 왔고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물론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 수녀님이 나오셔서 함께 노래 부르는 시간을 가졌다. 수녀님은 활기찼고 성당 참석자들이 모두가 합창에 참여하도록 능숙하게 지도했다. 늘 스페인어로 드리는 미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오늘 역시 그저 까미노와 산티아고 페레그리노란 단어만 들어도 감사할 뿐이다.
이어 마지막으로 기다리고 고대하던 향로의식이 이어졌다. 수녀님은 노래를 부르셨고, 향로가 향을 피우며 대성당 끝에서 끝으로 크게 움직이던 그 순간, ‘드디어, 드디어, 내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와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이곳에 왜 왔는가 하는 이유가 선명히 다가왔다. 그리고 눈이 아파왔다.
나는 그저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었다.
어디에 계신지 모르는 나의 하느님이 날 이끄셨던 것이다.
내게 ‘넌 그저 너 혼자 잘 살아온 것이 아니다.
네가 그렇게 살아온 것은 하느님의 이끄심이 있으셨던 거다.’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그렇게 날 이곳 산티아고로 보내신 것이다.
난 이제껏 그저 운 좋은 여자려니 했다.
그렇게 운 좋은 여자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함의 표현이라고 여겼다.
오만하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의 표현이었고,
자랑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두루두루 사랑하면서 베풀면서 살아가겠다는 내 양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나로 살아가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 간직하면서…….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운이 좋아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난 저 하늘 위에 계신 나의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분은 날 잡아주셨고,
내게 운 좋은 여자라는 느낌을 갖도록 하면서,
내 삶을 늘 돌아보도록 하셨고,
좀 더 겸손하도록 가르치셨고,
그래서 내 친구들을 보내주셨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게 하셨고,
그 친구들 속에서 내게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셨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친절과 진정한 베풂의 의미를 그저 걷는 가운데
몸으로 익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난 그저 단지 운이 좋은 여자가 아니라,
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여자였다.
날 사랑하는 분이 날 이끄셨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또,
감동한다.
미사 후 캐시와 유리와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광장에 나와 까미노 중에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났다.
나탈리에, 마이클....
모두들 힘껏 안을 수 있는 우리의 친구들이다.
오후에는 나탈리에와 점심을 먹고, 카페에 앉아 가족들에게 엽서를 썼다.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었다.
시간 내서 학교 아이들과 샘들에게 엽서를 보낼 생각이다.
지도를 보며 산티아고를 돌아다녔다.
유서 깊은 건물들을 보고, 차바티도 사고, 뮤지엄도 둘러보았다.
뮤지엄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책과 타피쓰리였다.
중세의 책들은 정말로 고귀해 보였다.
출판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써나갔고,
아름다운 색채로 그림을 그려 넣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책들이었다.
한 땀 한 땀 아름답게 수를 놓았던 타피쓰리의 그림들을 보면 절로 그 정성과 땀이 느껴진다.
아마 종교의 힘이었을 것이다.
이제 내일은 묵시아로 갈 예정이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
캐시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잠을 청했다.
2015년 9월 23일 산티아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