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일차, 나의 도보를 끝내며...
아, 걷는 것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아, 걷는 것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을까?
무척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래도 좋았다.
세상 끝까지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도보를 했다.
또다시 시작하는 나의 도보…….
하지만 또 다른 느낌.
캐시가 깨워주지 않았고,
잔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가 묵은 숙소는 뮈니시빨(Municipal)이 아니다.
우리 숙소 바로 위에 뮈니시빨이 있었는데, 그곳은 피스테라에서 걸어온 순례자들만을 받았다.
아니면 산티아고에서 묵시아까지 걸어온 사람만 받는 곳이었다.
나처럼, 버스를 타고 온 사람은 묵을 수가 없었다.
괜찮았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렇게 걸어온 사람들에게 우선권과 저렴한 비용이란 혜택을 주는 이러한 시립(Municipal) 알베르게가 정말 필요하다.
나 또한 그들, 순례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그들에게 안락한 숙소를 저렴하게 제공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 마음을,
다 안다.
그런데, 그 숙소에 사람이 꽉 차서 내가 묵은 숙소까지 와서 머문 사람들이 많았다.
나처럼 산티아고에서 버스로 온 사람보다,
피스테라에서 걸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오늘 깊은 잠에 빠질 예정이다.
그들은 오늘 일찍 일어나 도보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렇게 게으른 아침을 즐길 권리가 있다.
나는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배낭을 싸고,
침실 밖으로 나와, 간단한 아침을 챙겨먹었다.
혼자 출발하는 첫 도보라 너무 어둡지 않은 시간에 출발하려고, 좀 시간을 끌었으나,
아무도 출발하는 이가 없었다.
묵시아에서 피스테라로 향하는 여정은 대부분의 순례자들에게는 낯선 일정이었던 것 같다.
조금 훤할 때 혼자 숙소를 나왔다.
어제 피스테라에서 이곳으로 오던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그들이 오던 그 길을 따라가면 되리라고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전망 좋은 곳으로 오르는 가 했더니,
이내 길이 없다.
잘못 들어온 것이다.
고민 끝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숙소로 다시 내려왔다.
저어기 남자 한 분이 올라온다.
"피스테라 가세요?"
"위~(프랑스 아저씨다.)"
"제가 길을 잃었어요."
"이 길이 맞아요. 작년에도 제가 왔었기 때문에 잘 알아요."
아, 또 나는 운 좋은 여자가 되었다.
이 친절한 남자는 피스테라 길이 어떻다고 사진을 보며 설명해 주었다.
남자는 걸음이 빨랐다. 날 힐끔힐끔 쳐다보며 앞서 걷는다.
길이 헷갈릴 즈음에는 기다려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묵시아를 거의 떠날 즈음 피스테라 화살표가 확실히 보였다.
이제는 혼자 걸어도 헷갈리지 않을 그런 안전한 길로 들어섰다.
남자는 이따금씩 날 기다리고는 내가 도착하면 또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묵시아에서 피스테라까지 가는 길에 카페가 단 한 군데 있었다.
그곳에서 그 분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곳에는 피스테라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가져온 바게트와 핫초코를 하나 사서 먹었다.
이제 부터는 길이 쉽다며 안전한 여행이 되길 바란다고 인사하고 남자는 먼저 길을 떠났다.
이제 진짜 혼자 걷게 되었다.
묵시아에서 피스테라로 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내가 오늘 본 사람들은 4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점심 무렵까지는 피스테라에서 오는 사람들과 피스테라로 가는 사람들을 이따금씩 만났는데,
늦은 오후부터는 거의 혼자서 걸었다.
하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다리가 많이 무겁긴 했다.
정말로 다리만 무겁지 않다면,
계속해서 걷고 싶었다.
음악이 친구였듯,
마치 걷는 것이 내 소중한 친구인 것처럼,
그 친구가 내 손을 잡아주는 것처럼,
그 느낌이 너무나 따뜻해서 그 곳으로 빠져들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그 친구 곁에 계속 있고 싶었다.
아, 걷는 것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아, 걷는 것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묵시아에서 피스테라까지의 30여 km를,
평화로운 마음으로 걸었다.
다리가 정말로 많이 무거웠다.
무척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래도 난 좋았다.
계속 세상 끝까지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묵시아로 가는 길은 작은 마을과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도 대서양을 품고 살아가겠지.
대서양을 품는 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한국의 시골마을에서 뒷산을 품고 사는 사람과
대서양을 품고 사는 사람은 우선 시선의 넓이가 다를 것 같다.
눈을 들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세상의 끝이라는 바다를 바라보며,
시선의 끝이 정해지지 않은 그 곳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궁무진한 것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다는 건,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겠다.
비록 나는 오늘 이 바닷길에서 하루를 살지만,
나도 그렇게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상상을 품고 싶다.
피스테라 알베르게 주인은 정말 친절했다.
지도를 보여주며, 피스테라에서 볼 만한 곳을 알려주었다.
피스테라에서 파로까지 가는 길도 알아냈다.
파로까지 가야 세상의 끝에 도착한다.
난 샤워를 하고 대망의 피스테라 바다 끝을 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중에,
영흠이를 만났다.
한국에서 대안 중학교를 나왔고,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는 중이란다.
막내 아들 같은 영흠이가 참으로 대견했다.
"함께 파로에 갈래?"
"뭐,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그러죠, 뭐."
파로에 가보니 정말로 대서양에 와 있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왜 사람들이 피스테라에 오고 싶어 하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묵시아가 소박한 대서양의 끝이라면,
이곳 피스테라는,
세상의 끝에서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다짐해야 할 것 같은,
만약 그동안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었다면 그 고난을 대서양이 다 가져갈 것 같은,
그런 떨리는 감흥을 일으켰다.
영흠이와 나는 각자의 마음속에 각자가 걸었던 길을 돌아보며,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대안학교를 다녔고, 어학연수를 하다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산티아고를 오게 되었다는,
그래서 피스테라의 파로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듯이 따라오던 영흠이도,
바다를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다.
"오길 잘한 것 같아요."
아직 불확실한 미래,
남들과 다르게 살아온 삶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이제야,
나의 도보는 끝난 것 같다.
이제야,
난 내 도보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저 바다가
이제 내려놓으라고 한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널 정말 사랑한다고…….
2015년 9월 25일, 피스테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