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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산책 Sep 22. 2023

말테의 수기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은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그렇다.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다. 아주 옛날이라는 얘기다.


연도는 1978년이다. 그때는 문방구에서 책을 팔았다. 가판의 아래 부분에 작은 책들이 꽂혀있었고 가격은 500원. 나는 무슨 책인지도 모르면서 호기심에 손바닥만 문고본을 집어들었고, 거기에는 “말테의 수기”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같으면 안경 없이는 볼 수도 없는 깨알같은 글씨로 인쇄된 그 책을 나는 읽고 또 읽었다. 릴케가 독일문학의 대표적인 시인이라는 것.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연모했던 젊고 아름답고 총명했던 러시아 여인 루 살로메의 화려한 애인 리스트 중에 릴케도 들어가 있다는 것. 나는 이런 내용을 아무 것도 몰랐다.


말테의 수기는 소설로 분류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줄거리라고 할 내용은 하나도 없다. 한 남자가 빠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투로 시작한다.


어린 시절에 책상 밑에서 갑자기 본 귀신의 손 이야기, 딸을 원했던 어머니 때문에 여장을 하고 계집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했던 과거, 사랑에 서툰 남자들 때문에 항상 오해당하고 결국은 혼자만의 사랑을 완성해야 했던 그리스 시인 사포와 같은 과거의 여인들, 할아버지의 대저택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나타나는 여자 유령.


아직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아이로서 읽었던 이 책의 모든 부분들은 나에게는 마치 내가 경험했었던 과거처럼 나의 기억속에 현실과 뒤섞여있다. 이 책에서 기억할만한 줄거리를 찾는다든가, 교훈을 얻을 수는 없다. 이 책은 너무나도 현실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역사에서 따온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는다. 마치 내가 살아온 현실처럼.


말테의 수기를 읽는 것은 단순한 독서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말테 (결국은 릴케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는)라는 남자를 만나서 그가 겪었던, 들었던, 만났던, 읽었던 모든 경험의 단편들을 생생하게 듣는 일종의 체험행위다.

유럽 지성사나, 문학이나, 그런 것은 아무 것도 몰랐던 한국의 12세 소년에게 번역본을 통해 읽은 말테의 수기가 자기의 실제 인생보다 더 깊게 각인된 체험으로 남은 것은 왜 일까.


그것은 말테의 수기에 담긴 이야기들은 인간이라면 언젠가는 겪게될 원초적 체험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유령, 죽음, 좌절된 사랑, 고독, 오해.


말테의 수기를 즐길만한 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어린 소년에게조차 문학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인생의 깊은 바닥까지 파고들어가는 정신의 모험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했던 이 책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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