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식에 맞는 옷차림

100일 글쓰기 - 93

by 모사가


* 이것 역시도 겨울에 써 둔 글이네요. 100일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썼던 글인데, 왜 또 서랍 속에 들어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은 오늘부로 100일 글쓰기가 마무리가 되었어요. 브런치는 중간에 시작하게 돼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다 보니 앞으로 며칠간은 시차가 맞지 않는 글이 올라오지 싶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의 옷차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하를 한참 밑도는 날씨에 봄가을용 면바지를 입고 다녀오다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팔랑팔랑 나풀대는 바지 위에 뽀글이 재킷과 오리털 점퍼까지 껴입은 모습은 정말이지 이해불가다.

사실 남편은 연애 때부터 희한한 패션 감각을 뽐내곤 했다. 얼룩덜룩 군복 무늬 반바지에 주황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나와 군인과 연애하는 느낌을 주곤 하더니(군인이 싫다는 게 아니다), 급기야는 분명 일찍 끝난 날이라 했는데 양쪽 옆구리가 망사로 된 등산복 차림으로 등장했다. 혹시 오늘 야유회라도 했나 돌려 묻는 말에 해사하게 웃으며 아니라 답하는데 정말 진지하게 헤어져야 하나 고민이 됐다. 진정 저 그물을 입고 출근했단 말인가!

게다 계절 감각도 꽝이라 여름엔 에어컨 바람이 춥다며 꼭 카디건을 입고 다니고(35도가 넘는데도), 겨울엔 히터가 답답하다며 얇은 바지를 고수한다. 말은 그럴싸한데 실상은 여름엔 땀을 뻘뻘 흘리고 겨울엔 달달 떨며 다닌다. 이쯤 되면 남편에게 옷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반면 나는 굉장히 세심하게 다음날 입을 옷과 신발, 액세서리, 가방까지 정해놓는다. 티피오가 1순위, 색이 2순위, 재질이 3순위, 시선집중 포인트는 4순위, 날씨, 이동수단 등등 셀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고려해 결정한다. 만약 내일이 그저 그런 평범한 출근이라면, 엉덩이를 덮는 검은색 폴라 니트와 검은 기모 바지, 카멜색 롱코트, 진주가 콕 박힌 벨벳 소재의 메리제인 구두, 작은 진주 귀걸이, 블랙 양가죽 퀼팅 버킷백을 들고나갔을 테다.

물론 나도 처음부터 유난스러웠던 건 아니었다. 일을 잘하는 게 중요하지 겉모습에 치중할 필요 없다,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오히려 도움이 되는 책을 하나 더 보자,라는 지극히 실용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때도 있었다.

대학원 다닐 때 일이다. 일반 대학원이지만 현직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해 저녁에 시작하는 수업이 꽤 있었다. 당시 나도 직장에 다니고 있어 늦은 수업을 주로 들었다. 언젠가 학교 근처 출장을 마치고 일찍 도착했었다. 우연히 연두색 등산복 차림의 교수님이 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보게 됐고, 지형학 교수님이라 어디 답사 다녀오시는구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저녁 6시. 교수님은 수업에 완벽한 정장 차림으로 들어오셨다. 심지어 넥타이까지 매시고.

기억을 더듬어보니 언젠가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수업에서 학생에 대한 예의를 잃으면 안 된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예의는 옷차림이다, 최소한의 것이지만 잘 갖추어 대하려 노력하고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결코 수업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내가 만나는 모든 일, 그리고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 옷차림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에 너무 정성을 쏟을 필요까지는 없다 생각한다. 명품을 휘감아 과시하고, 신상에 목메는 건 더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비싼 것이 예의와 동의어는 아니다. 다만 상대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 존중받고 있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예의다. 기실 관계 맺음의 핵심이다.

그나저나 여전히 무례한 우리 남편, 예의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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