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 속의 마음

100일 글쓰기 - 19

by 모사가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세간살이에 관심이 생긴다. 부엌에만 가면 부진아라는 엄마 말씀처럼 특히 부엌살림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는데 어느 순간 예쁜 그릇이나 컵류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얼마 전 지인 한분이 컵을 샀다며 단톡방에 올리셨다. 투박하면서도 키치한 바흐가 중앙에 그려져 있어 독특한 느낌이 났다. 어느 백화점에 가면 10% 할인을 받아 해외직구보다 싸다며 알려주셨는데, 막상 그 가격을 주고 사자니 좀 많이 망설여졌다. 깨지면 끝일 텐데, 어차피 물 마시고 커피 담으면 어딘들 똑같지, 내가 쓰면 얼마나 쓰겠나, 그런 생각이 이어졌다.


실은 교과서 집필을 거절한 이후로 약간의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막연히 그려왔던 몇 갈래의 길 중 마지막 길마저 갈 수 없겠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원망이 쌓였다. 그 대상은 당연히 남편과 시집이 되었는데, 울분이 해결되지 않은 채 시기적으로 설까지 겹치니 스트레스가 대단했다.


그런 내가 신경 쓰였는지 남편이 무심히 "뭐 갖고 싶었던 거라도 있어?"라고 묻는다. 예전 같았으면 돈으로 해결하는 게 제일 성의 없고 쉬운 거라며 화를 냈을 텐데, 이제는 그런 마음이 아니란 걸 안다. 이 정도까지 생각이 미친 게 고마워 삐죽거리며 "갖고 싶었던 컵이 있는데 말이야."라며 운을 띄웠다.


여기저기 다 품절이라 간신히 부산에서 구한 컵이 오늘 도착했다. 남편은 돈만 건네고 구매의 처음과 끝은 모두 내 차지였지만, 그 과정이 꽤나 즐거웠다. 물론 컵을 받아 든 남편은 "이게 그 가격이라고?" 초를 치긴 했지만 그 정도쯤은 쿨하게 넘겨줄 수 있다.


컵에 그려져 있는 유명인들 중 모차르트를 골랐다. 제일 인기 있는 건 오드리 헵번과 칼 라거펠트, 코코 샤넬이란다. 바흐를 샀던 지인에게 누가 "아버지가 타주는 커피 맛이겠네" 했던 이야기가 떠올라 도착하자마자 "천재가 타주는 커피"를 맛봤다. 맛은 뭐 그냥 똑같은데, 마주 보는 모차르트는 반갑다. 이상하게 긴 속눈썹은 좀 어색하지만.


글 쓰려 앉은 밤, 주방 한편에 고이 자리한 모차르트에 물을 따른다. 어쩌다 우리 집까지 오게 됐는지. 나의 허영 섞인 투정과 남편의 알면서도 눈감을 수밖에 없는 처지의 합작품이다. 서로 이기고 지면서 부부는 살아가나 보다. 이번엔 컵, 다음엔 또 무언가, 하나씩 늘어가는 물건들에 각자의 미안함과 서운함을 담는다. 많아지지 않아도, 많아져도, 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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