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은 내 몫

100일 글쓰기 -29

by 모사가


피아노 레슨이 있는 날이다. 아침부터 여기저기 들러야 할 곳이 많아 부지런을 떨며 악보를 챙겨 집을 나섰다. 연습실이 아이 유치원 바로 근처라 하원 시간에 맞춰 스케줄을 잡아 놨다.

10분쯤 먼저 도착해 악보를 한번 훑어보고는 들어갔다. 뿔랑의 오마주 투 에디뜨 피아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생님은 현대곡 같지 않게 멜로디가 너무 좋다고, 이 곡 꼭 하자며 흥분하셔서 이야기하셨다. 지난번 레슨 땐 분명 현대곡이 싫다고 하셨는데 쳐보니 마음이 바뀌셨나 보다.

첫 음은 늘 어렵다. 시작이라 생각하지 말고 지나가는 음으로 상상한다. 중간에 분위기와 리듬이 바뀔 땐 숨을 크게 한번 쉰다. 또박또박 열심히 모든 음을 빼먹지 않고 치겠다는 전투적인 자세 대신 대충 치는 것도 필요하다. 음을 공간에 띄우지 말고 잡아 내린다. 느껴지는 것을 담아내면 된다. 레슨은 점점 형이상학적인 세계로 나아간다. “차이가 들리세요? 어떤 느낌인지 들리시죠?” 들리긴 하는데 내 손으론 구현이 잘 안 된다. '선생님,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아시나요?'

1시간의 레슨을 마치고 탈진에 가까운 상태로 간신히 나왔다. 아이를 또 데리러 가야 하니 부리나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손목의 워치는 부르르 진동하고, 차에선 부딪힐까 경고음이 삐삐- 울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드디어 좁은 코너를 빠져나와 액셀을 밟으려는 순간, 누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피아노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을 놓고 나왔다. 아이 하원 시간을 잊을까 맞춰 놓았던 알람이 울려 선생님이 발견하셨나 보다. 문제는 알람음이다. 쇼팽 마주르카를 배경으로 조성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안녕하세요, 피아니스트 조성진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여러 차례 무관중 라이브 공연을 했었는데요, 텅 빈 공연장은 마치 꼭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는 기분이 듭니다. 모두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음악의 역할에 대해서 느끼게 되는데요. 위로가 필요할 때 그리고 작은 일상 속에서도 음악은 참 중요합니다. 엄선된 음악과 음악가들의 이야기가 있는 KBS 클래식 FM을 통해 더욱 다양하고 깊이 있는 음악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무려 방송 시간에 맞춰 기다렸다 녹음하고, 파일로 변환하는 수고로움까지 거쳐 설정해 놓은 알람음이다.

선생님이 박장대소하며 창문 너머로 휴대폰을 흔드시는데 너무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딱히 조성진 좋아한다는 걸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뭔가 굉장히 민망한 방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레슨 중에 어떤 피아니스트 좋아하냐 물으셔서 조성진과 소콜로프를 이야기하긴 했었는데, 이렇게 아. 주. 많. 이. 좋아하는 것까진 안 들키고 싶었나 보다. 아이돌 쫓아다니는 10대 소녀도 아니고, 불혹을 앞두고 어린 연주자를 좋아해 알람음까지 바꿔놓는 주책스러움을 놀림받을까 그렇다.

“조성진 목소리가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저도 선생님이 제 휴대폰을 흔들며 웃고 계셔서 너무 놀랐어요.'

선생님 얼굴을 어떻게 봬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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