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뜨개질을 엮어서
내가 뜨태기와 씨름하는 사이, 성큼 여름이 다가왔다. 분명 마지막으로 뜨개질했던 때가 만물에 눈이 쌓인 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나무마다 푸른 이파리를 남발하는 여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뜬, 정확히 말하면 뜨다 만 편물은 네트 백이었다. 미니 스퀘어 백을 뜨고 남은 털실로─라이트 데님 컬러의 푼토 실이다. 이 실에 대해 말하자면 긴데, 대바늘로 스웨터를 뜨기 위해 대량으로 주문했다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코바늘 스퀘어 백으로 노선을 틀었다. 그래도 실이 남아 처치 곤란이다─새로운 디자인의 가방을 시도해보고 싶어서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뜨려고 한 것이었다. 비록 ‘뜨려고 한’ 것에서 그쳐서 가방도 아니고 바구니도 아니고 네트 그 자체로도 활용할 수 없는 요상한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이어서 떠볼까 했지만 이미 애정이 식은 터라 손이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요상한 존재는 요상한 존재로 남겨두기로 한다.
옷 뜨기를 한 번 실패하고서 한동안 시무룩한 상태로 지냈다. 동시에 옷 뜨기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졌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유튜브와 블로그를 열심히 찾아보던 중 발견한 것이 레이어드 드레스였다. 민소매로 된, 꽃 패턴이 가득 담긴 레이어드 드레스. 그 아름다운 모양새와 하늘하늘한 분위기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민소매는 끈으로 되어 있어서 어깨 위로 묶어 길이를 조절할 수 있었고,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 혹은 다른 드레스와 레이어드해도 예쁠 듯했다. 마침 내가 가지고 있는 흑색 청바지와 레이어드하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내가 스웨터 뜨기를 실패한 이유는 나와 대바늘이 상극이기 때문이었고 레이어드 드레스는 코바늘로 뜨는 편물이니까 이번에는 성공하지 않을까 싶었다. 시무룩했던 날들이 무색하게 곧장 털실과 도안을 구매했다.
털실은 도브 컬러의 콘사였는데, 콘사는 처음 사용해 보는 거라 실물을 마주하자 확 긴장되었다. 여기서 볼실과 콘사의 차이점을 잠깐 설명하자면, 볼실은 공(ball) 모양으로 감겨있는 실을 뜻하고, 콘사는 콘(corn), 그러니까 원뿔 모양처럼 생긴 심에 감겨있는 실을 뜻한다. 볼실은 여러 가닥의 실을 한 가닥으로 꼬는 연사로 이루어진 제품이 많지만, 콘사는 그렇지 않은 제품이 많다. 연사가 탄성이 좋고 세탁 후 수축도 적어서 볼실의 제품성이 더 좋다. 다만 가격이 높다. 또 일정한 양만큼 소분되어 있어서 하나의 볼실을 다 쓰면 다른 볼실과 직접 연결해야 한다. 반면 콘사는 원하는 합수만큼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다.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어서 때에 따라 알맞은 실을 선택하면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뜨고자 하는 레이어드 드레스가 콘사로 이루어진 편물이라 콘사를 택했다. 도브 컬러는 회색과 살색 사이의 오묘한 색상인데, 실제로 받아 보니 초록색 한 방울이 섞인 것 같았다. 아무튼 마음에 들었다.
마음 말고 또 빼앗긴 것이 있다면 잠이다. 잠을 빼앗겼다. 근래 잠을 잘 자지 못한다. 고등학교 시절 우울증이 심했을 때는 너무 잠이 와서 문제였는데, 지금은 잠이 오지 않아 문제다. 겨우 잠들고, 자꾸 깬다. 두세 시간 간격으로 눈을 뜬다. 누군가 중간중간 나의 잠을 빼앗아 가듯. 길게 이어진 나의 잠을 칼로 툭툭 썰 듯. 아침에 일어나면 빼앗긴 게 없는데 무언가 빼앗긴 기분이다. 불면증 역시 우울증 증상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나자 빼앗긴 기분이 조금 나아졌지만, 온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잠을 빼앗겼다고 믿는다. 나를 증오하는 누군가로부터. 내가 용서를 빌어야 하는 누군가로부터.
그런 와중에 마음을 빼앗긴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빼앗기면 더 큰 마음이 되어 되돌아온다. 뭐든 두 배가 되어 내 가슴 속에 다시금 자리 잡는다. 마음이 그런 것처럼 언젠가는 빼앗긴 잠이 단숨에 몽땅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그때가 오면 단잠을 실컷 자야지. 생각하며 코바늘을 쥔다. 실을 검지와 새끼손가락에 걸고 뜨개질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