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뜨개질을 엮어서
뜨태기가 제대로 와버렸다.
뜨태기는 뜨개질 권태기의 줄임말인데, 뜨개질에 흥미를 잃은 시기를 뜻한다. 올해 봄부터 뜨태기가 스멀스멀 찾아오더니 지금은 코바늘을 쳐다도 보기 싫은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뜨개질을 애찬하던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니까 뜨개질의 이면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뜨개질은 안정과 고즈넉함을 선물한다. 뜨개질할 때만큼은 평안하고, 편물을 완성하고 나면 뿌듯하기까지 하다. 털실을 만질 때는 또 어떤가. 손가락에 걸린 그것의 따뜻함과 보드라움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다. 겉으로 보면 뜨개질은 이렇다. 우리가 흔히 알고 알려진 뜨개질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내가 깨달은 지점은 이것들과 조금 다르다. 뜨개질을 하려면 코바늘과 털실, 그리고 단수 표시링, 단추, 라벨과 같은 부가 재료가 필요하다. 코바늘은 레이스용과 모사용으로 나뉘는데, 옷이나 파우치 같은 일반적인 편물을 뜰 때는 모사용 코바늘을 사용한다. 모사용 코바늘은 1호부터 10.5호까지 크기가 다양하다. 털실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질감과 색상의 털실이 존재한다. 즉, 이것들을 구비하려면 충분한 돈이 필요하다. 물론 코바늘을 크기별로 모으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털실을 살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하나의 편물을 완성하면 다음에는 새로운 편물을 뜨고 싶어지기 마련인데, 편물마다 필요한 코바늘의 호수와 털실의 종류, 부가 재료가 다르다. 새 편물을 뜰 때마다 그에 맞추어 필요한 재료를 사야 한다.
평안함을 위해 시작한 뜨개질이 커다란 부담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새로운 코바늘을 샀으니 매일 열 단이라도 떠야지, 특별히 고가의 털실을 샀으니 이번 편물은 반드시 완성해야지, 라는 생각들이 얽히고설켜 의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뜨개질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코바늘을 잡기 전부터 지쳐버렸다. 어느새 뜨개질은 나를 짓누르는 짐이 되어 있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뜨개질은 꽤 가혹한 현실이었다.
“그럴 수 있지.”
그때 누군가 그리 말했다. 친구였는지, 연인이었는지, 휴대전화 화면 속에서 본 유튜버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분명 그리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뜨개질을 향해 날 서 있었던 나의 무거운 마음이 단숨에 깃털처럼 가볍게 가라앉았다. 그럴 수 있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행위든 항상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간 내 세상은 그럴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우울증이라는 병이 그럴 수 없었고, 우울증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과 친구 들이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럴 수 없는 세상에서 그럴 수 없는 나를 마주하는 일이 가장 고단했다. 내가 나를 가장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해 주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 꽤 가혹한 현실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럴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뜨개질에는 적용하지 못했다니.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늘 새로운 순간을 뜻하고, 뜨개질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기에. 그럴 수 있는 세상에서 그럴 수 있는 나로 살아가려고 한다.
플라스틱 상자에 담아둔 푸른색 털실 한 뭉치를 꺼낸다. 아무 호수의 코바늘을 잡고 무엇이든 떠나간다. 이것이 편물이 될지, 그 무엇도 되지 못하고 꼬인 털실로 남을지 알 수 없지만, 뭐든.
이제는 그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