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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티브 Nov 09. 2020

일이 뭐길래… 나이도, 나도 속이는 엄마들

[그 엄마가 궁금해서] 왓챠 시리즈 <미세스 아메리카>, <영거>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엄마. 납작한 모성이 아닌 다양하고 풍부한 엄마의 서사를 발굴합니다.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작품 있으면 언제든 댓글 통해서 추천해주세요.


사례 1.

평범한 주부인 40세 A. 15년 전 일을 그만두고 키운 딸은 교환학생으로 인도로 떠났다. 이제 한숨 돌리나 했는데 웬 날벼락, 도박을 일삼던 남편이 불륜까지 저질렀다. 게다가 도박빚으로 집까지 날리고... 더는 참을 수 없어 이혼했지만 당장 갈 곳도 없고 먹고 살길도 막막하다. 15년 만에 다시 돌아간 출판업계에 그가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이래 봬도 대형 출판사 최연소 에디터였건만. 경력은 비었지만 열정은 가득했던 그에게 장애물은 '나이'였다. 40살 엄마에서 26살 싱글 여성으로 나이를 속인 그는 뉴욕의 손 꼽히는 출판사 마케팅팀 어시스턴트로 다시 일을 시작한다.


사례 2.

아름다운 외모, 능력 있는 남편과 바르게 자란 여섯 아이. 완벽한 가정을 꾸리고 평탄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B에게 단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판'이었다. B가 나서려고 하는 1970년대 미국 정계는 남자들로 득실거렸다. 뛰어난 국방・안보 전문가였지만 남자들은 그에게 서기 역할을 맡길 뿐이었다. 내 자리를 얻기 위해 B는 자신을 속이는 방법을 택했다. 당시 대세였던 성평등 헌법수정안(ERA)에 반대하며 '반페미니즘'의 선봉에 선 것이다. ERA가 비준되면 여자들도 군대에 가야 하고 이혼하면 양육비도 받을 수 없다는 거짓말로 불안과 공포를 자극해 보수 주부층을 집결시킨 그에게 드디어 워싱턴도 관심을 보인다.


두 가지 사례 중 하나는 실화이며 하나는 완전한 허구다. 마치 소설의 한 장면 같으면서도 실제 있었을 법한 두 엄마의 이야기. 사례1의 주인공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영거(Younger)>의 라이자 밀러, 사례2는 1970년대 미국 ERA 법안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Mrs.America)> 필리스 슐래플리의 이야기다.


15년 만에 다시 돌아간 출판업계에 그가 설자리는 없어 보였다. (사진 출처 : <영거> 캡쳐)


일은 하지만…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일상


거짓말로 시작한 커리어가 안정적일 순 없다. 나이를 속인 <영거>의 라이자는 거짓말이 들킬까 늘 전전긍긍한다. 26살 나이에 맞게 외모를 꾸미고 지인을 만날까 늘 조심해야 하는 일상이 버겁다. 일이 잘 풀릴수록, 함께 일하는 여성 동료들과 끈끈해질수록 마음은 더 불편하다.


화사하게 웃는 필리스의 눈과 입꼬리에는 항상 묘한 분노가 서려 있다. <미세스 아메리카>의 인상적인 첫 장면, 남편이 후원하는 정치인 모금 행사에 비키니 차림으로 무대에 선 필리스의 서늘한 미소를 잊을 수 없는 이유다. 지친 하루의 끝에서 남편의 성관계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급기야 생방송 토론에서 남편이 자신을 '순종적'이라 말했을 때 붉으락푸르락하던 얼굴은 그가 자신을 속이고 있음을, 그 거짓말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음을 보여준다.


필리스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다른 여성들을 속이고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필리스의 단체 'STOP ERA'는 "우리의 특권을 빼앗지 마(Stop Taking Our Privileges)"라고 목소리 높인다. 남편의 보호를 받으며 밖에서 일하지 않고 가정을 지키는 주부들의 '특권'을 빼앗지 말라는 것인데 필리스의 수발이 됐던 여성들은 의원들에게 로비를 하고, 보도자료와 연설문을 쓰고, 예산을 편성하고 수지를 맞추며 '일'하고 있었다. 남편의 폭력까지 무릅쓰며. 극 중 ERA 진영의 하원의원 벨라 앱저그는 그들에게 필리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필리스 슐래플리의 진실을 알려줄게요. 그 여자는 거짓말쟁이에 선동가, 사기꾼이에요. 그중에 최악은 망할 페미니스트라는 거죠. 미국에서 제일 해방된 여자라니까요.


거짓말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 <미세스 아메리카> 캡쳐)


내 자리를 얻기 위한 거짓말


하던 일, 하고 싶은 일을 계속, 잘하려는 것뿐인데. 엄마가 일을 하려면 나도, 남도 속여야만 하는 걸까. 드라마일 뿐이라고, 특별한 경우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엔 기시감이 크다.


올해 초 구직 면접을 봤을 때다. 장시간 진행된 최종 면접은 분위기가 좋았다. '됐구나' 싶었을 때 화살처럼 날아든 마지막 질문 "그런데… 아이들은 누가 보나요? 야근도 가능한가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온몸이 화끈거렸다. 말로만 듣던 그 순간. 마법 같은 질문이라고 했다. "네, 아이는 조부모님이 봐주세요. 야근할 수 있습니다."라고 홀린 듯 거짓말을 하게 된다고. 그렇지만 난 다른 것에 홀린 듯했다. 솔직하게 내 상황을 말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저와 남편이 같이 돌봐요. 친정엄마가 도와주고 계시지만 기본적으론 저희 부부가 책임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주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일상적으로 야근은 어렵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최대한 일을 끝내고 가정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책임지는 게 제가 일하는 방법이에요. 아이들이 없는 것처럼 일할 수는 없습니다.


절박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금방 지쳐 들통날 거짓말이라는 것 또한 잘 알았다. 회사는 나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며 최종 결과 고지를 늦췄다.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그곳엔 내 자리가 없었던 듯하다. 내가 필리스처럼 나를 속이고 거짓말을 했더라면, 라이자처럼 면피하기 위해 면접관들을 속였다면 난 그 회사에서 일할 수 있었을까.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특히 <영거>와 <미세스 아메리카>는 이 순간을 계속 떠올리게 했다.


금방 지쳐 들통날 거짓말이라는 것 또한 잘 알았다. (사진 출처 : <영거> 캡쳐)


다양한 여성들의 서사


전혀 다른 장르인 두 작품을 통해 '엄마의 일'을 반추하며 씁쓸해했지만 다양한 여성들의 서사를 마주할 수 있었던 점은 아주 흥미로웠다.


특히 다양한 여성들이 함께 일하는 여러 방식을 볼 수 있다는 게 이 두 작품의 감상 포인트이기도 하다. <미세스 아메리카>와 <영거>는 각각 정치계, 출판계라는 전문 분야에서 여성들이 협력하고 때론 경쟁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특히 인물 한 명, 한 명의 서사를 세심하게 시리즈로 엮은 <미세스 아메리카>. 그중 흑인 최초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셜리 치점의 당내 경선을 둘러싼 갈등 서사는 단연 압권이다.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서 절대 굽히지 않거나 완전히 양보하며 서로를 북돋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영거>는 각자 다른 나이, 상황의 여성들이 우정을 나누고 연대하는 모습을 유쾌하게 그린다. 사실은 40대인 라이자가 20대 여성들과 성공적으로 협업하는 모습을 통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공고히 하며 동시에 기혼·미혼을 떠나 40대 이후의 여성들이 가진 커리어 고민도 함께 나눈다. 라이자 외에 '엄마'인 주요 캐릭터가 없는 점, 라이자가 오롯이 엄마였던 시절과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을 다소 부정적으로 그리는 점은 아쉽다.


두 작품 모두 시기와 질투라는 결점도 애써 숨기지 않지만 여성 서사에서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 또한 명확히 한다.


여성들이 협력하고 때론 경쟁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사진 출처 : <미세스 아메리카> 캡쳐)


누구도 속이지 않아도 되는 일


나를 속이지 못했던 나는 얼마 전 다른 회사에서 새로 일을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다양한 여성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면접에서 업무 시간을 조율하기 위해 먼저 내 상황을 설명했다. 일할 수 있는 시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능력, 일에 대한 나의 비전과 가치관까지. 그러다 같은 여성이면서 업계 전문가이자 선배인 대표와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게 됐고 결국 우린 함께 일하기로 했다. 나도, 남도 속이지 않아도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나를, 그리고 남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조력자들을 희생하게 하는 거짓말 "나는 더 많이 할 수 있어요." 같은 것들. 누구도 속이지 않고 일하고 싶다. 괜찮지 않은 건 '괜찮지 않다' 말하고, 내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나가고 싶다.


라이자와 필리스의 본격 커리어 성장을 위한 거짓말 대서사는 어떻게 끝났을까.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찾아보시길 추천.



감상 TIP

* <섹스앤더시티>를 좋아한다면 <영거>, 좋아하지 않는다면 <미세스 아메리카>
* <영거> 보고는 싶지만 연애에는 관심 없다면 해당 부분은 스킵 해도… (저는 그랬답니다. 연애세포 안녕 ㅠㅠ)
* but <미세스 아메리카>는 꼼꼼하게 보세요!
* <영거> 마케팅 팀장님은 <미세스 아메리카> 베티 프리던의 절친으로도 출연한 '시선강탈 캐릭터' 미리암 쇼어!




Written by. 에디터 인성

읽고 보고 듣고. 만나고 얘기하고. 정리하고 쓰고 만들고. 공유하고 연결하고.


<마더티브> 인스타그램 instagram.com/mother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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