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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Oct 04. 2022

나의 첫 풀코스 마라톤

아파서 한걸음, 눈물 나서 한걸음, 창피해서 한걸음, 고마와서 한걸음.

마흔 전의 나에게 뭘 해주면 좋을까.


더 나이 먹음 도전하기 어려운 걸 해내 보고 싶었다. 툭 던지듯, 마흔 전 풀코스 완주해보고 싶어! 하는 내 말에 지인은.


“그저 멋있어 보이려고 도전하는 게 아니에요. 삶에 진심을 담아 연습과 준비, 도전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도전이고, 적어도 한 달에 150킬로 정도는 달리는 연습을 해야,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을 텐데 괜찮겠어요?”


처음엔 오기가 생겼었다. 그리고 사실은 연습을 열심히 못했다. 9월 한 달 달린 거리는 139km. 장거리도 가장 많이 달렸던 거리는 하프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번 주는 계속 다른 일을 하면서도 풀코스 걱정을 잔뜩 했다. 비틀거리고, 절뚝거리고, 엉엉 울면서도 완주는 해보고 싶다고.



걱정도 팔자


경기 일주일 전. 말 그대로 나는 멘붕에 빠져버렸다. 이런저런 정보를 찾다가 오히려 준비가 안된 나에 직면해버렸다. 카보 로딩(경기 일주일 전 탄수화물 제한식, 경기 전 3일 정도 탄수화물 집중식을 통해 근육 내 글리코겐 저장도를 끌어올리는 식이요법) 은 뭔지. LSD(Long Slow Distance) 훈련은 적어도 30킬로까지는 해봐야 한다던데.  복근 훈련과 발목 강화훈련은 매일 꾸준히 해야 한다던데. 부족한 것, 안 한 것들이 수두룩 빽빽이 었다. 준비해야 할 물품도 찾으면 찾을수록 많았다.


하루하루 온라인 쇼핑몰을 방문해가며 아이템을 하나씩 마련했다.

(물품을 적어놓는 건, 광고라기보단 엄청나게 서칭 한 결과물인 데다 사용해보니 써볼 만해서,
혹여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남기는 것. 모두 내 돈 내산이다)


1. 골반에 잘 고정되는 레이스 벨트
#오니지러닝벨트

2. 흡수가 빠르고 각성도가 높은 에너지 젤

#아미노바이탈 파워젤

3. 힘들어서 얼굴을 찌푸려도 잘 가려준다는 러닝 고글(결국 얼굴을 가리는 기능?!)

#루디프로젝트 프로펄스

4. 땀이 흘러내려 시야를 가리는 것을 방지하는 헤드밴드

#아디다스 와이드헤드밴드

5. 몸에 마찰이 있어도 쓸리거나 찰과상이 생기지 않도록 부드러운 소재의 싱글렛, 쇼츠는 가급적 반바지보다는 몸에 붙는 타이츠가 좋단다.

#브룩스 브라탑, 싱글렛 #룰루레몬 러닝 쇼츠

6. 양말은 미끄럼이 적고 물집이 생기지 않는 두꺼운 소재의 마라톤 전문 양말.

#렉시 아치 서포트 삭스

7. 네다섯 시간 동안 지겨움을 덜어줄 방수 기능이 있는 골전도 이어폰 등등.

#Shokz오픈무브


매일 온라인 쇼핑몰을 뒤적이며 걱정을 소비로 달랬다. 심지어 그 주간에는 온라인 오프라인 회의, 강의도 매일매일 다섯 건이나 예정되어 있었다. 연습도 못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급기야 대회 4일 전 목요일엔 먹은 걸 다 토하고 잠을 설쳤다. 몸도 마음도 가난해졌다. 물건이 많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안심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예민 보스가 따로 없었다.



도움을 청할 용기


러닝 크루 밴드에는 나처럼 걱정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보, 격려의 한마디, 영상자료, 경험담 등등이 매일 올라왔다. 하지만 불안함은 계속해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은 나를 달리기의 세계로 인도했던 지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멘탈이 안정이 안돼요. 뭘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불안해할 수는 있지만, 해낼 수 있을까 자신을 믿는 게 어렵다면 당신이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 나를 믿어봐요>


"제대로 연습도 못했고, 다녀와서도 일정이 수두룩한데. 무리가 되고 고생이 되어 다음 일정까지 망쳐버릴까 봐 부담스러워요."


<기록을 낼 것도 아니고, 이제 처음 시작인데, 연습 삼아 한번 해보는 거예요. 천천히 슬슬 달리고 온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힘들 도전도 아니에요. 천천히 7분 30초/km 속도로 가면, 크게 무리되지 않을 거예요. 정 힘들면 함께 가이드 러닝 해줄게요>  


누군가에게는 쉽게 결심하고 쉽게 도전할 미션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도움이 필요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써왔건만. 매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하는 나날들은 대회로 어찌어찌 가더라도 컨디션 난조를 만들 것이 뻔했다. 혼자 이겨내 보려 안간힘을 쓰다 겨우 용기 내어 지인에게 부탁을 했다. 지인은 생각보다 쉽게 부탁을 들어주었는데, 부탁을 들어주었는데도 나는 괜스레 그에게 미안해 혼자 또 전전긍긍했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이왕 부탁한 거, 차라리 뻔뻔하게 미안해하고 한껏 고마워하기로 했다.



대회 전날 시뮬레이션


지인은 대회 전날 아침부터 대회 당일의 루틴을 만들어 보면 좋다고 추천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레토르트 미역국에 햇반을 한 그릇 실하게 말아먹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긴장하면 오히려 화장실 신호가 오지 않아 혹여 대회날에도 무거운 뱃속 사정을 감당하며 달려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아침을 든든히 먹고 따뜻한 커피 한잔을 챙겨 몸과 마음을 릴랙스 했다. 거짓말처럼 아침에 화장실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전날이지만 대회 때 입을 풀셋을 장착하고, 대회 시간에 맞춰 출발점에 갔다. 지도를 찾아보며 대략의 코스를 돌아보고, 다행히 이번 코스는 오르막 내리막이 심하지 않은 코스였지만 길의 상태와 현장의 느낌을 두루 점검했다. 출발 지점에서부터 5킬로 정도 내 속도를 체크하며 달려보고, 따릉이를 타고 주차장소로 돌아왔다. 왠지 내일의 느낌이 괜찮을 것 같았다. 가볍게 비가 내렸는데, 이 정도의 비라면 내일 또 비가 와도 시원하게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대회날도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점심에는 자장면을, 저녁에는 피자와 라면을 먹었다. 헤비 해서 잘 먹히지 않던 메뉴였는데도 내일이 큰 열량을 쓸 대회라고 생각하니 어마어마하게 맛있었다. 과식은 몸이 무거워질까 봐하지 않았지만, 속이 든든했다. 드디어 내일이 대회다!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지인에게 긴장되고 걱정되는 마음, 준비하며 힘들었던 것들을 하나씩 털어놓고, 응원해달라고 부탁하고서는 따뜻한 응원을 마음에 하나 둘 가득 채워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의외로 꿈도 꾸지 않고 잠들었다.



대회 당일, 출발!


어제 시뮬레이션해 본 루틴대로, 아침에 후다닥 풀셋을 챙겼다. 러닝 크루 사람들과 함께 만나 이동하기로 했다. 조금 미적거리다 늦은 듯했는데, 러닝 고글이 보이지 않았다. 멘붕 멘붕. 러닝 크루 일행들에게 대회장으로 바로 이동한다고 기별을 해 두고 어제 메고 다녔던 가방 속에서 러닝 고글을 찾았다. 대회 풀셋은 꼭 눈에 보이는 곳에 다 꺼내놓자. 작은 걸 빼먹어도 멘털에 손상이 온다. 마음에 릴랙스를 외치며 대회장으로 향했다. 비가 소복소복 오는 날이었던 탓에 우비를 챙기고, 젖어도 달리기 괜찮은 따뜻한 비이기를 마음으로 기원하며 운전을 했다.


가볍게 워밍업을 하고, 러닝 크루 일행들과 만나서 배번과 물품을 챙기고, 스타일링을 마쳤다(의외로 스타일링이 참 중요하더라. 달리는 내 모습을 멋지게 느껴야, 달리기가 좋아지는. 나는 좀 기분파이기도 하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 출발점으로 향했는데 웬걸. 대회장 안내 소리가 작았는지 이미 풀코스는 출발하고 6분이 지나있었다. 모르겠다. 어차피 배번 칩 기록 기준이니 나와 동반주를 약속해 준 지인은 출발 센서를 밟고 자체 출발을 했다. 출발점 인파와 응원소리, 각 크루들의 분주한 출발 등등 왠지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주로가 좁아서 느리게 달리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혼잡구간을 벗어나기까지만 6분대로 달려보기로 했다. 초반 늦게 출발하기도 하고, 반환점이 제법 많은 코스라 초반 탄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부르며 응원하는 함성소리가 계속 귓가에 울렸다. 처음엔 즐거웠는데 조금 과하다 싶기도 해서 너무 과하게 응원하는 러너들은 앞으로 고이 보내드렸다. 금방 페이스를 잡고 다른 러너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7분 30초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이 속도로 30킬로 정도를 유지하며 간다.



초반~30km 지점


30킬로까지는 해볼 만했다. 오다가다 아는 사람이 보이거나 러닝 크루 일행이 보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서로의 레이스를 응원하면서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그 힘에 또 한걸음 한걸음 달렸다. 30킬로대까지는 줄곧 7분 10초~ 7분 20초를 왔다 갔다 하는 페이스로 달렸다. 하프 반환점이 2시간 15분대였다. 어랏... 이대로 가면 5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기대를 했지만 욕심부리지 않기로 했다. 하프까지는 여러 번 달려봤다. 골반, 무릎, 발목 모두 하프까지는 큰 문제없이 달릴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물며 하프 대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가고 있다. 이대로 계속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동반주 해주고 있는 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달리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하고, 노는 듯, 소풍 가는 듯 러닝을 이어갔다. 평균 페이스, 총 시간, 총 거리, 심박. 모두 안정권이었다. 심박은 130~140을 왔다 갔다 했고, 숨이 가쁘거나 힘들다고 느껴지는 구간이 없었다. 이대로 쭈욱 가면 큰 문제없이 완주다. 행복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풀코스 할 만 한데? 하는 오만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32km 지점~ 끝


30킬로가 넘어가면서 골반과 무릎이 뜨거워지고 아프기 시작했다. 눈물이 났다. 한번 눈물이 터지니 많이 울게 됐다. 다른 러너들이 30킬로가 넘어가면 지옥의 구간이 시작된다고 했는데. 정말 지옥의 구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도 36킬로까지는 어찌어찌 갔다. 울면서 달리고, 달리면서 울고. 그래도 통곡은 안 했다.

지인은 "이제부터 마라톤이에요. 진짜 나를 이기는 레이스는 지금부터에요." 라며 나를 독려했다. 36킬로를 넘어가면서 골받이 뻣뻣하고 무거워졌다. 무릎은 점점 뜨거워졌다. 내일 많이 아파서 일정을 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이 앞섰다.


 너무 아프고, 너무 못하고, 너무 열심인 내가 속상했다. 뭐든 열심히 하면 얼추 어느 정도는 해내는 나인데 달리기만큼은 너무 느리고, 너무 어렵고, 너무 힘든 게 속상했다. 속도가 많이 느려졌다. 나는 부지런히 바닥을 밀어가며 달리고 있는데, 페이스가 점점 8분대로 떨어졌다. 모래 속을 달리는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고, 점차 고통 외에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왜 이걸 시작한 거지"

"왜 연습을 제대로 못했지"

"왜 이 정도 아픔을 견디지 못하는 거지"

"왜 남들은 다 쉽게 하는데 나만 이렇게 어려운 거지"

"나는 왜 눈물이 나지"


수많은 질문들이 떠오르고, 대부분 나에 대한 직면이었다. 열심히 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삶에서 많이 배운  알았다. 대체로 성장하는 과정이거나, 아니면 욕심을 부렸거나   하나. 열심히 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직면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깨달음일 것이다. 그런데 고통 중에 얻는 깨달음은  서러웠다. 마지막 코스를 엉엉 울면서 달렸다. 끝내 마지막 1.5킬로는 걸었다. 도무지 아파서  걸음도  내딛기가 어려웠다. 무릎은 화끈거리고, 발바닥도 뜨겁고. 엉엉 우는 내가 부끄럽고.  와중에 지인은 말없이 음수대에서 물을 건네고, 파워젤을  먹어보라며 건네주고. 옆에서 노래를 흥얼거려 주고. 멋지고 장하다며 응원을 흠뻑 뿌려 줬다. 그게  고맙고 미안해서 나는 엉엉 울었다.  그렇게 울다 보니  시원하기도 했다. 끝이 없는 것만 같았던 이정표의 키로수는 어느덧 41킬로를 넘어가고, 마지막 음수대의 자원봉사자님이 웃으며 "꼴찌는 면했어요" 하고 말해줬다. 42킬로를 5시간 30여분에 달리고 있었다. 아니 막판에는 걷고 있었다. 꼴찌는 면했단다. 살면서 꼴찌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달리기는 엉엉 눈물이 나도록 열심히 했는데도 꼴찌에 간당간당한 수준이다. 결승선이 보였다. 크루 리더님이 혼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밴드의 위치 공유 기능을 켜놓고 달린 덕분에, 결승선에 도달하는 시점을 크루 리더님이 맞춰서 나와준 거다(리더님은 다음 메이저 대회 풀코스를 준비하느라 4시간대 페이스 조절을 하며 풀코스 완주를 끝마치고 우리를 한시간 넘게 기다린 거다). 사실 1~2킬로 전에 크루 일행을 결승점에서 만났을  우는 모습을 들키면 너무 창피할까  눈물을 꾹꾹 눌러놓았다. 그런데 사진을 찍어주려 나와있는 리더님을 보니  눈물이 물색없이  흘렀다. 엉엉. 다들 웃는데 나는   힘든  마쳤는데도  우는 거냐. 울보 러너야.


가까이서 달려준 지인과, 자신의 레이스를 끝내고 기다려주고 응원해준 크루 사람들이 고마와서. 엉엉 울면서도 눈물이 시원해서 한걸음 더 가고, 창피해서 한 걸음 더 가고, 아팠지만 가야 끝나는 걸 알기에 한 걸음 더 가고, 함께 달려준 지인에게 고마와서 한 걸음 더 가니 레이스가 끝났다.


이후의 근육통은 내 몫이지만:)

해냈다! 내 공식 첫 풀코스 기록은 5시간 29분 48초. 눈물과 함께, 지인의 애정 어린 응원과 함께. 크루 일원들의 공동체가 주는 힘과 함께. 마흔 전에 나에게 이뤄주고 싶은 다소 욕심이 과했던 도전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기진맥진 녹초가 된 채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D+1

당일은 손 하나 까딱을 못하겠더니, 느리게 느리게 달렸던 덕분에 나는 가벼운 근육통밖에 못 느끼는 채로, 풀코스 다음날을 맞이했다. #짐승 같은 회복력

어떨지 몰라 버티고 견뎠던 첫 경험을 너머, 다음번엔 이 경험으로 강해진 몸뚱이를 이끌고, 조금 더 내 주체의 목표를 세워 달성하고 싶어졌다. 다음번엔 울지 말아야지. 페이스북에 후기를 간략히 남겨놓았더니 한 분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다음번엔 보스턴 마라톤에 나가야죠"

아? 그렇게 울어놓고 또 설레는 걸 보니. 달리기 매력에 빠져도 단단히 빠졌나 보다.  


#풀코스 마라톤 #국제평화마라톤 #풀코스 완주 #달리는 여자 #울보 러너 #해냈다 #YYRC #여의양화러닝크루

 https://band.us/@run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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