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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Aug 20. 2021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성장

마음속에서 길을 잃은 자존감에 지도 쥐어주기

 매력이 있다는 건 분명 자랑거리다. 그동안 나는 SNS상에 ‘매력이 있어 보이는’ 무언가를 할 때마다 자랑하고 싶어서 포스팅을 하곤 했다.


무언가를 배웠을 때, 셀카를 찍었는데 예뻐 보일 때, 운동이 잘 됐을 때, 좋은 곳에 갔을 때, 내가 점유하고 있는 무언가가 좋아 보일 때.


 왜 매력을 그렇게나 자랑하고 싶었을까. 나는 혼자서는 참 나약해서, 괜찮고 싶고, 잘하고 싶고, 괜찮고 잘한다는 걸 나 혼자 인정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누군가의 좋아요나 댓글이 달리면 기분이 좋고, 안심도 됐다. 누군가에게 아무런 피드백이 없는 나는 무언가 잘못하고 있거나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  내 본의는 그런 뜻이 아니었노라고 항변이라도 하겠건만,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라고, 공유한 콘텐츠에 반응이 없으면 오히려 더 불안하더라.


 내가 자랑해놓은 포스트에 달린 ‘좋아요’는 무슨 의미일까. “확인” 의 의미일 수도, 부러움의 의미일 수도, 보기 좋다는 일종의 평가일 수도, 공감의 뜻일 수도, 어쩌면 습관적 리액션일 수도 있다. 사실은 ‘좋아요’ 만으로는 그 뜻을 명확히 알 수 없다. 그저 확인하는 사람의 의미부여가 있을 뿐. 좋아요가 수십, 수백 개 달리는 사람의 삶이든, SNS를 하지 않는 사람의 삶이든 삶이 한 사람에게 가하는 무게의 묵직함은 비슷할 것이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삶의 본질 안에서 먹고, 상호작용하고, 생산하고, 소비하고, 또 필요 없어진 것들을 폐기물로 배출하며 살아간다. 어떤 몸이든, 어떤 삶이든, 좋고 나쁨이 없다. 그를 평가하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삶이 받는 좋아요나 부러움은 그 삶의 본래적 무게와 별개다.


 그럼에도 부러움은, 대상이 된 삶을 편할 거라고, 좋을 거라고, 적어도 내 삶보다는 덜 무거울 거라 착각하게 만든다. 나아가 부러움이 질투로 이어지면, 대상이 된 삶을 폄하하며 절름발이식 자기만족을 하게 하기도 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던가.


 질투가 느껴질 ,  질투는  삶을 따라가고픈  욕망임을 알아차리면, 그래서  삶을 어떻게 질투가 이끄는 욕망의 방향에 맞춰 업그레이드할 것인가에 대한 하우투가 생긴다.  배움이나 연마를 위한 하우투가 아니더라도, 마음의 방향이나 자존감에 대한 하우투가 생길  있다.


 참 부러운 지인이(심지어 부러운데 친하기까지 한) 몸을 만들어 바디 프로필을 찍었다. 부럽기도 하고, 예쁜데 몸까지 만든 지인이 어딘지 대단하기도 하면서도 질투가 났다. 내 질투를 꽁꽁 잘 숨겨놓고 있었는데, 그녀가 함께 호캉스에 가자고 했다. 같이 사진을 찍다 못생긴 질투가 내 옆구리의 애교 살처럼 삐질삐질 삐져나올까 봐 걱정이 됐다. 함께 놀러 가고 싶었는데(친하니까), 함께 놀러 가기 싫었다(내 못난 자존심 때문에). 그래서 생각하다가… 그녀를 ‘남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그는 근육을 만들어 바디 프로필을 찍은 거야. 더 매력 있게 된 거야!’


성별을 바꿔 생각하고 보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거울을 보니 그녀와 나란히 놓고 비교하던 내 못생긴 콤플렉스는 흩어지고,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만 남았다. 생기발랄한 내 매력의 본질은 누가 옆에

온다고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다시 마음속 그녀의 성별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씩 웃었다. 그리고 잘 놀고 왔다. 물론 그녀와 이 부러움과 질투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눴음은 물론이다.


부러움과 질투, 그로 인해 한 뼘 성장하는 인간다움의 통찰 사이, 우정도 조금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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