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의 설레는 하루 1

열정 불사르기

by 보물상자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배트맨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특별히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노래는 매일 아침마다 흥얼거리는 배트맨의 18번이다.


무역회사에 근무한 지 17년째 되는 박태욱 팀장. 그는 회사에서는 유능한 직원이자 존경받는 상사였고,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자 세 쌍둥이의 훌륭한 아빠였다. 그의 별명은 배트맨이다. 그가 다니는 ‘세계로 무역’의 직원들이 올해 그의 마흔다섯 번째 생일을 맞아 선물로 붙여 준 별명이다. 다름 아닌 ‘Best man’을 줄여서 부른 별명이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에게든 박팀장은 베스트 맨이었다. 의미가 그래서인지 배트맨이란 표현은 듣는 박 팀장도, 부르는 아내도, 아이들도, 직원들도 모두 좋아하는 호칭이 되어버렸다.

여느 때처럼 이 아침에도 콧노래가 이어진다. 모르는 사람이 배트맨의 출근준비 과정을 우연히 봤다면 로또라도 당첨된 걸로 생각할 것이다. 배트맨의 아침은 늘 그렇다.




“여보, 나 갔다 올게.”

막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네. 박태욱입니다.”

“팀장님! 저, 김현성입니다.”

반가운 목소리였다. 김현성은 박 팀장이 친조카처럼 아끼고 챙겨주었던 부하직원이었다. 일도 잘했고, 마음씨도 착했으며 예절 바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장남역할을 당당히 해내는 의젓한 젊은이였다. 동생들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던 현성은 적은 액수였지만 연봉을 더 주겠다는 타 회사의 제의를 받고 정든 직장을 떠나야만 했다. 3년 전 현성의 결혼식 때 본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통화도 오랜만이라 현성의 음성은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어 그래. 잘 지내고 있지?”

“저야 잘 지내죠. 팀장님은요? 항상 찾아본다 하면서도 잘 안 되네요...”

현성은 전화를 하면 죄송하다는 표현을 어떤 말보다 먼저 했다. 두 사람이 못 만나는 것을 자신의 게으름 탓으로만 돌렸다.

“잘 지낸다니 좋구먼. 아내도 잘 있고?”

“네. 이번에 드디어 임신에 성공했습니다. 축하해 주세요.”

“어 그래? 정말 축하하네. 애 가졌을 때는 특별히 잘해주게. 물론 평소에도 잘하지만 말이야.”

“그래야죠.”

다소 흥분된 목소리였다. 하지만 바로 직후 두 사람의 전화는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저 사실은...”

“응 뭔데?”

“언제... 아니 조만간에 식사라도 같이 했으면 해서요.”

“그럼~ 언제든지 전하만 하고 와. 내가 자네 밥 한 끼 못 사주겠는가? ”

배트맨은 조만간이라는 단어가 걸렸다. 재빨리 떠올려 보니 오늘 저녁엔 특별한 스케줄이 없었다.

“아니, 저녁에 시간 되면 오늘이라도 오든지.”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그래. 괜찮으니까 저녁에 보자고.”

배트맨은 궁금했다. ‘오랜만의 전화였고, 만나고 싶어 한다. 그것도 오늘 당장이라도...’



“3년 만이구나. 이렇게 만나는 것도.”

“그러게요. 뭐가 그렇게 바쁜지 연락도 제대로 못 드리고 시간만 흘렀네요.”

“회사생활은 재미있고?”

“... 일을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냥 먹고살려고 하는 거죠.”

인사차 가볍게 던진 말인데 순식간에 무거운 분위기가 만들어져 버렸다. 무거운 분위기를 유도한 것 같아 미안한 맘도 들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현성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항상 열정을 가지고 일하던 현성이 아니었던가! 그 무엇이 현성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배트맨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힘든 일 있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대리로 승진도 했고... 덩달아 월급도 올랐고... 예쁜 와이프에... 건강도 좋고요...... 나쁠 게 없죠.”

“듣고 보니 그러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뭔가의 찝찝함은 여전했다. 배트맨은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원인을 찾고 싶었다. 아니 원인의 힌트라도 찾고 싶었다. 그런 맘을 알았을까?

“회사생활이 싫다거나 지긋지긋한 것은 아닌데요... 왠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팀장님은 안 그러세요?”

세계로 무역의 훌륭한 멘토이기도 한 배트맨은 현성의 문제가 무엇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배트맨이 내린 현성의 병은 반복되는 일에 대한 권태감이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빈곤도 걱정도 질병도 슬픔도 아니다.

다름 아닌 삶에 대한 권태이다.

-마키아벨리-




“자네는 ‘새벽’이라든가, ‘아침’, ‘첫날’ ‘시작’ 이런 단어들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나?”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글쎄요.... 일찍, 새로움, 활기, 신선함, 탄생... 뭐 이런 것들 아니겠어요?”

배트맨은 현성의 답변에서 예전의 마인드 회복가능성을 감지해 냈다.

“난 개인적으로 그런 단어들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이 설렘이야.”

“설렘이라... 그거 좋은 단어군요.”

“그럼, 자네 요즘에 말이야,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아침을 어떤 느낌으로 시작했던 것 같나?”

“.........”

“혹시 설렘이라는 단어나 그와 비슷한 느낌의 단어가 떠올랐던 것 같나?”

“아니 뭐...... 글쎄요.... 부끄럽지만 설렘도... 비슷한 단어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럼. 주로 어떤 단어들이 떠오르지? 아침에 일어나면?”

현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졸리다’, 식탁에 앉으면서는 ‘세수하기도 밥 먹기도 귀찮다’, 달력을 보면 ‘월급날은 아직도 멀었구나’, 출근을 생각하면 ‘숨 막히는 만원 지하철을 오늘도 타야 하나!’ 뭐 대충 이런 생각들인 것 같아요.”

현성의 표정에는 월요일 아침의 무거움이 줄줄이 표현되고 있었다.

“그래. 현대인들의 대부분이 하루를, 특히 월요일 아침을 설렘으로 시작하기보다는 좋지 못한 감정의 단어들과 연관을 시키곤 하지. 아침을 그렇게 시작하면 하루가 즐거울 리 없는데도 말이야. 난 참 그게 안타까워.”

본격적인 조언이 시작됨을 감지한 현성은 귀를 쫑긋 세웠다. 현성에게 이 만남은 분명 목적이 있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흐트러진 자신을 위해 뭔가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과거에 함께 근무하면서 많은 조언을 해주셨던 팀장님을 찾아온 것이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월요일이면 설렘은 고사하고 월요병에 병들어 있지.”


p53. 일어나기 싫은 아침.jpg


현성은 본인도 그랬는지 머리를 긁적여 본다.

“월요병에 걸린 사람들은 어때. 아침에 출근하면서 지겨운 하루가 또 시작되었구나! 오늘 하루는 어떻게 버티나! 기나긴 일주일은 또 어떻게 보내나! 하고 퇴근시간만을 기다리지.”

자신의 행동을 들킨 것 같은 느낌에 현성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시간 때우기식으로 일을 하지. 그냥 시간만 죽이는 거야. 그것이 시간을 죽이는 게 아니라 본인의 장래를 죽인다는 사실을 모르고서 말이야.”

현성의 심장은 더 크게 점점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장래를 죽인다는 뜻은...”

“그런 사람이 회사에서 유능한 사람이 되기는 어려운 일 아니겠어? 운이 매우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야. 승진은 남의 일이 될 것이고, 승진한다 해도 연공서열의 덕택으로나 되겠지. 회사에서 무능한 사람이 되고, 승진도 못한다면 장래는 뻔한 것 아니겠어?”

‘내가 이번에 승진한 것도?....’, ‘내 장래가 만년 대리로 남는 것도?...’ 현성은 연공서열 덕택의 승진도, 만년 대리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콧속으로 타는 냄새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먹고 싶었던 삼겹살이었건만 어떤 것은 숯껌댕이가 돼버렸다.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배트맨도 현성도 큼직 막하게 상추에 싸서 입에 밀어 넣었다. 시커멓게 된 불판도 갈았다. 고기를 불판에 다시 올려놓고서 배트맨이 다시 말을 이었다.




“월요병 알지?”

“네.”

“어떤 사전을 찾아보니까 이렇게 나오더라고. ‘월급쟁이가 토요일과 일요일에 지나치게 놀거나, 푹 쉬지 못해서 월요일에 느끼게 되는 피곤한 상태’라고.”

“맞는 말이네요.”

“근데 난 이 정의에 동의하고 싶지 않아.”

“그래요? 제가 생각할 땐 잘 설명한 표현 같은데요...”

현성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팀장님 생각은 어떤데요?”

“사전의 해석은 육체적인 면에만 초점을 두었다는 생각이 들어. 난 월요병은 육체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심리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거든.”

현성은 다음 얘기가 궁금했다.

“우리 초등학교시절로 돌아가 볼까?”

“초등학교 시절이요?”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삼겹살을 향했다. 딱 좋은 시점이었다. 한 점씩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고는 배트맨이 말을 이었다.




“초등학교시절에도 월요일은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지?”

“그랬었죠.”

“자 그럼. 월요일에 소풍을 간다고 상상해 봐.”

“월요일에 소풍을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경험에 현성의 고개를 거리자 박 팀장이 말을 이었다.

“월요일이 평소처럼 수업하는 날이 아니고 소풍 가는 날이라고 가정해보잔말이지. 우리는 과연 소풍 가는 월요일에도 월요병에 걸렸을까?”

대답을 안 했지만 현성의 표정에선 ‘그건 아니겠죠’라는 단어가 묻어 나왔다.

“아마 그렇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일요일밤이 왜 이렇게 길은 거야’라고 불평하면서 월요일 아침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겠지.”

“그랬었죠. 소풍날 가지고 갈 음료수며 과일이며 초콜릿 등등 그리고 소풍가방까지 모든 걸 확인하고 또 확인하느라 잠도 설쳤었죠.”

현성도 옛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가에 엷은 미소를 그려보았다.

“바로 그거야! 우리가 월요병에 걸리는 이유는 몸이 지치고 피곤해서가 아니야. 우리도 모르게 월요일을 힘들고 지겨운 단어들하고 연결시켜 심리적으로 월요일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거야.”

현성은 뭔가 잡힐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배트맨의 말은 계속됐다.

“소풍 가는 날이 들떴었던 것처럼 월요일 출근을 즐겁고 행복한 영상으로 연결시킨다면, 활기찬 출근이 가져올 자신의 발전과 가족의 행복에 가져다주는 혜택들을 떠올린다면, 어느 누구도 월요병에 걸리지 않을 거야.”

“그렇겠군요.”

“이쁨도 미움도 다 자기한테서 나오듯이, 출근의 기쁨도 행복도 불행도 다 내 맘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국 설레는 출근! 행복한 출근! 은 내 맘속에 있는 것이군요. 내 사고가 주관하는 것이고요.”

현성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두 사람은 하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후식으로 수정과가 나왔고 한 모금씩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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