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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운 Mar 27. 202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역사인식 고취'보다는 '역사인식 과잉'을 경계한다

1. 시골에도 도서관은 여러 곳 있다. 심지어 관사에도 작은 도서관이 있다. 이용객이 많지 않아 운영시간이 짧고 규모가 작고 장서가 많지는 않지만 베스트셀러는 웬만하면 다 있다. 그래서 규모가 작은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한다. 빌려보기 어려웠던 베스트셀러를 마음놓고 빌려볼 수 있다. 그 중 최고의 수확,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 보통 '유교'라고 하면 '꼰대', '고리타분함'과 같은 따분한 단어가 떠오르기 마련인데, 조선의 설계자들이 주목한 '유교'는 썩 유연하고 실리적이었던 점이 흥미롭다. 조선 초기의 건국자들에게 '유교'란, 현대에 이르러서 고리타분한 문화로 느껴지는 유교적 생활양식보다는, '정치 시스템'이나 '실리', '수단'으로 활용하는 모습이 더 돋보인다.


흔히 전제군주제는 군주가 성군이냐, 폭군이냐에 따라 변동이 큰, '인치'라는 점에서 취약하다고 인식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조선의 건국자들도 이 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이 꿈꾼 유교정치 시스템은, 치밀한 견제에 의한 통치를 강조해서, 현대 법치국가 시스템마저 묘하게 겹쳐보이기도 한다.


폭군인 연산군도 결국 쫓겨났다는.

'사대'도 마찬가지다. 조선 초기의 건국자들에게 '사대'란 그저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힘이 너무 커 싸워 이길 수 없으니 사대를 하지만, 내치에 관한 자주권을 요구한다. 중국도 오랑캐를 직접 힘으로 제압하기엔 부담이니, 자주권을 인정해주고 대신 반기를 들지 않겠다는 증표로 황제국의 예우를 받는다. 일종의 주고받는 거래에 가깝다. 거래에 불과했기에 당연히 작은 분쟁들도 생겼고, 조선 스스로도 자강에 소홀하지 않았다.


(C) yes24


3. 유교정치에는 동의했지만, 조선의 건국은 기어코 반대했던 정몽주의 후예들. 낙향해 학문과 후학양성에 힘쓰던 '사림'이 조선 중기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유교는 가히 종교에 가까운, 극단적 원리주의에 가깝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사회와 문화를 통제하고, 양반 사대부의 권한을 확대시키고 이를 정당화하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꼰대스러운' 유교다.


사림은 친소관계를 기준으로 붕당정치로 분화한다. 성씨를 따서 대윤, 소윤이 등장하더니, 거주지를 기준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한다. 붕당은 저마다 자신들의 아이돌을 만들고, 이를 추숭하는 서원을 예루살렘으로 삼았다. 죽어라 서로 나라가 망할 듯 아뢰지만, 결론은 그저 아이돌의 명예회복일 뿐이다. 이황, 송시열처럼, 조정을 벗어나 야인으로 지내면서, 막후에서 자신과 친한 주요인사들을 통해 정국을 조종하는 '비선실세 아이돌'까지 나타난다.



아이돌은 조선에만 있지 않다. 수단에 불과했던 '사대'는 목적이 되어버렸다. 개혁군주라는 영조조차도, 망한지 100년도 넘은 명나라 황제의 명예를 위해 눈물까지 흘리며 제사를 지냈다. 정말 나라가 망할뻔 했던 왜란과 호란에서는 뻔히 국난을 예견하고도 '어떻게든 되겠지'로 일관할 뿐 실질적 대책은 없었다.


흔히 조광조는 비운의 개혁가로 평가되지만, 고개를 갸웃할만큼 추숭과 명예회복에 집착하는, 원리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사림은 등장부터 원리주의로 폭주할 맹아가 심어져 있었다면 과언일까. 최전성기라 할 조선 초기에는 역동적인 모습에 가슴이 뛰다가, 조선 중기 사림의 등장 이후로는 답답함에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4. 00년대 초반까지 아주 오랫동안 3김의 거주지를 기준으로 '동교동계', '상도동계', '청구동계'라는 말이 유행했다. 3김의 정계은퇴 후에는 유력 정치가의 친소관계를 기준으로 '친O'라는 말이 20년 넘게 쓰이고 있다.


한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하지만 미래가 밝은지는 장담할 수 없다. 미래세대인 젊은이들부터 사라져가고 있다. 누구나 문제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대안, 논쟁은 거의 보이지 않고, 유력 정치가들의 명예회복에 관련된 주장, 저마다 상대방의 역사인식을 탓하며 지난 역사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만이 뉴스를 뒤덮는다.


흔히 역사책 독후감은 '역사인식을 고취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역사인식의 과잉'을 경계하게 된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지나온 시간이다. 그 <무한도전>조차 모르는 세대가 왔다. "어떻게 <무한도전>도 모를 수 있냐?"가 아니라, 그저 당연히 시간이 흐른 것이다.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살아야 한다.


이게 엊그제 같겠지만 무려 17년 전입니다...


다만 거울 삼아 비추어볼 뿐이다.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위치로 오게 되었나. 우리의 성공은 어디에서 기인했으며 실패는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현재와 미래에 발 디딛고 서있지 않은 역사는 반동이다. 역사는 미래와 대안을 설계하기 위한 수단에 그쳐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를 부르짖으면서도 반복하지 않아야 할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영영 미래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5.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되어 할 말이 무척 많지만, 사족으로 남기고 일단 여기까지. <삼국지>보다 오백배는 유익하다. 별 5개.




P.S.1.

조선이 멸망으로 치닫는 구한말은 더더욱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다. 이걸 얘기하려면 서세동점(서양 세력이 동아시아 중국 중심의 질서를 무너뜨리던 시기)의 형국과 그 중 유일하게 열강이 된 일제의 특성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일제강점기를 다룬 박시백 화백의 <35년>의 감상에서 따로 남기기로 한다.

다만...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35년>은 딱히... 추천하기는 어려움.



조선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P.S.2.

정도전, 이이, 이순신. 세 명이 유독 돋보인다. 조선사를 통틀어 드물게 문제점을 정확히 짚은 이들이었고, 실질적인 개혁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모두 일찍 죽어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해 무척 아쉽지만, 개혁과 대안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많은 영감을 준다. 특히 이순신. 정말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P.S.3.

서늘한 기시감 하나 더. 조선 후기 숙종시대부터 한양으로의 집중이 심화된다. 한양 수도권에 기반을 둔 '기호파'만이 관직을 독점했고, 지방의 사대부들은 중앙관직에서 멀어져, 지방의 유지, 호족으로서 지방 이권에만 골몰하기 시작한다. 오. 하느님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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