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머리를 제때 자르지 못하는걸까?
1. 나는 한참 샤기컷, 울프컷이 유행하던 시절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구렛나루 1cm가 소중했고, 갸스비 왁스 한덩이가 생명과도 같던 시절이었다. 친구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화장실로 달려가 소중한 구렛나루를 손질했다. 갸스비 왁스는 나름 사치품이었기에, 몇몇 친구들은 물을 묻혀서라도 머리를 정돈하곤 했다.
싸이월드 감성이 넘치던 이 시절, 나 역시도 머리 스타일에 상당히 예민했다. 사춘기여서 그랬는지 어떤진 모르겠지만, 그냥 친구들처럼 봐도봐도 똑같은 거울 속의 나를 그루밍했다. 하지만 사방으로 뻗치는 직모를 가진 나에겐 샤기컷이나 울프컷은 언감생심이었다.
미용실에서 전문가 선생님들이 멋드러지게 왁스를 발라주면 그럴듯 했지만, 마치 12시가 땡치면 모든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머리만 감으면 내 머리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때부터였을까, 난 머리에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기 시작한것 같다.
2. 군대가기 전까지, 나는 한결같이 참한(?) 머리 스타일을 고수했다. 여름이 되면 짧게 잘랐고, 겨울이 되면 살짝 덥수룩하게 길렀다. 이때는 머리에 잔뜩 힘주고, 스타일링 하는 친구들의 흐름에 휘둘리지 않았다. 난 그냥 직모고, 생머리니까, 그냥 깔끔하고 단정하기만 해도 평균 이상은 될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했던것 같다.
근데 이게 문제였던것 같다. 어느순간 나에겐 머리 자르는게 숙제가 되어버렸다. 방학 숙제를 미루고 미루면 개학 전날 밤을 새야하는 것처럼, 내 머리카락도 덥수룩을 넘어 지저분한 수준이 될 때까지 수시로 방치되곤 했다.
3. 어제, 나는 2주간 잘라야겠다고 마음만 먹은 긴 머리칼을 커트했다. 이번에도 마치 방학숙제마냥, 미루고 미루다가 미용실을 예약했다. 근데 왠걸, 자르고나니 괜히 스스로가 댄디해보이고, 머리도 훨씬 가볍게 느껴진다. 현충일이 준 하루의 휴일간, 뭔가 스스로 업그레이드 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머리를 자르는 동안, 나는 왜 머리를 제때 자르지 않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남들은 좀만 지저분해보여도 바로 미용실로 향하는데, 나는 머리가 덥수룩해지는 두달 가까운 시간동안 도대체 뭘 믿고 머리를 안자른걸까? 몇가지 킹리적 갓심을 기반으로, 가설을 세워보았다.
-1. 머리 자를 시간도 없이 바빴다 -
첫번째 가설은 내 바쁨의 정도에 관한것이다. 난 루틴을 중요시여기며, 스스로를 굉장히 채찍질 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니 혹시 요즘 너무 바빠서 머리를 못자른게 아닐까?라는 가설을 세워보았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최근 3개월을 돌아보면, 바쁘긴 바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스스로 머리가 길다는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자르자면 언제든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자를 수 있었다. 심지어 최근엔 휴일도 있었고, 늦잠을 잔 주말도 있었으니 이 가설은 말도 안된다는걸 3초만에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2 . 머리 커트 안해도 사는데 지장없다 -
지장이 있을지 없을진 아무도 모르지만, 이것도 실패한 가설이다. 첫번째 가설을 통해 알 수 있듯, 나는 머리를 자르고 좀 더 깔끔한 이미지를 보이는게 이득이 될 수 있다는걸 알고 있다. 특히 다수의 미팅, 발표 등이 있는 업무 특성상, 깔끔하게 커트된 머리는 확실히 큰 도움이 된다.
글을 쓰다보니 더 혼란스럽다. 나는 도대체 왜 머리를 제때 자르지 않고, 극한의 상황까지 가는걸까?
-3. 가설은 틀렸고, 앞으론 제때 자르자 -
잠시간 모든 가설들을 검토하며, 난 깨달았다. 그냥 게을러서 머리 안자른걸, 난 그럴듯한 핑계로 무마하려고 하고 있다는걸. 내 게으름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짧지만 다양한 가설을 세운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최소 3주에 한번씩 머리를 자르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사실 이런 다짐을 한게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엔 많은 생각을 한 만큼 이 다짐이 오래가길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