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운트레이크 Apr 29. 2023

나만의 프로젝트가 뭘 해줄까(1)

세상은 My 프로젝트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아니 이미 많은 선택을 하며 여기까지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왜 '선택했다는 느낌' 그게 없어 보일 때가 많다. 왜 그럴까? 내 선택이 아니라 주변의 선택을 따라왔기 때문 아닐까.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나? 없다. 초등학교를 갈지 안 갈지 내가 선택할 수 있나? 없다. 초등학교 짝을 선택하기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인가 원하는 짝을 옆에 두기 위해 노력했지만 난 한 번도 없었다. 대학 진학은 선택이었을까? 전공과목 선택도 내가 어떻게 골랐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릴 때 먹고 싶은 것도 선택이라기보다 본능적 욕구에 가까웠다. 나는 옷도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골라주고 추천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아마 최초(?)의 선택권은 대학시절 단체 미팅에 나가서 원하는 상대를 고민할 때 처음 행사 해본 거 같다. 나만의 특수한 인생 스타일인지도 모른다. 아마 직장 들어갈 때까지는 본인의 선택보다는 부모님의 기대와 주변의 시선을 따르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스스로 위로해 본다.


어쨌든 이 선택이라는 것이 대학 졸업 후 직장 선택단계부터는 제법 요구 수준과 난이도가 올라간다. 그런데 이 또한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는 좀 더 '안전한 정답'을 찾는 과정에 가까웠다. '이 정도 돼야 하지 않을까?', '부모님이 좋아하실까?', '후배한테 이 정도면 먹히겠지?' 사실 고민한 선택이라기보다 적당한 선에서 선택된 경우에 '이 정도면 되겠지' 감사한 마음으로 일단 가야 했다. 다양한 선택권을 가진 친구도 있었지만 내가 속한 일반 리그에서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스스로 선택할 일은 더 없었다. 부서 배치부터 시작해서 점심 메뉴나 저녁 회식도 선택권이란 없었다. 그땐 그랬다. 회사에서 그나마 내가 선택했던 것은 현업을 떠나 프로젝트 활동에 참여하는 결정을 감행했던 것이다. 가장 '선택'이란 결정에 가까웠다. 이렇게 선택할 일이 없었나. 


선택권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가 없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일 텐데 '자유가 없다'는 그런 느낌까지는 또 아니다. 그냥 고3 입시 생활이나 군대 생활보다 자유스럽다면 정확한 표현일까? 인생이란 살면서 행하는 '다양한 선택의 총량'이라고 하는데, 나는 선택이라기보다는 주변이 원하는 정답을 찾아왔다는 느낌이 더 든다. 물론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직장인의 하루 일과는 출근하고 퇴근하면 끝난다. 형식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달랐다. 머릿속의 감정 노동은 자면서도 일어난다. 주말에도 방심하면 몸은 집에 있으나 머리는 회사로 출근해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건 내 선택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직장은 내 시간과 열정을 쏟는 모든 대상의 집합체니까. 그렇게 마음을 위로해야 했다.


그래도 압박감이나 스트레스가 세질 때는 이런 것들을 털어버릴 이벤트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개봉영화 첫 주말보기, 가족과 즐거운 주말 나들이 등이 주요 이벤트였다. 회사 안 '노동시간'과 직장 밖 '자유시간'으로 일상이 반복된다. 그것만으로도 사실 감사하고 충분하다. 그런데 난 뭔가 심리적 갈증 또는 약간의 불안감 같은 것을 느꼈다. 아마 지금의 평안함에서 오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느낌이었을까? 물론 이 느낌도 내 선택은 아니다. 


'이렇게 시간 보내도 되나.. 남들은 뭐 하고 지내나?'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 당시 팀장의 "지금 뭐 하고 있니.. 네 프로젝트를 하고 있니?" 이 말이 꽂혔던 것이다. 그럼 주변에선 각자 무슨 프로젝트를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나는 대기업에서 많은 사람들과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 얕은 인맥의 한계일지 모르겠으나 어디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평일저녁 술자리와 주말 골프가 가장 많아 보였다. 이 프로젝트를 숨기는 사람들은 없었다. 오히려 항상 무용담을 전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보였다. 그런데 이 두 종류는 나에게는 의무방어전이었다. 다른 형태의 회사 업무 연장선으로 겨우겨우 쫓아가기에 바빴다. 내 선택은 아니었다.




내가 회사 업무 외에 '나의 시간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이런 어려운 선택을 해본 적이 없다. 취미를 만들어 보려 발버둥 친 시기도 있었다. 당시 인기를 끈 스쿼시, 볼링, 테니스를 열심히 따라다녔다. 근데 결혼 후엔 흥미를 잃었다. 가족이 생기고 나선 아내 그리고 아이와 함께하는 그런 시간 자체가 좋았다. 이런 행복한 시간을 단단하게 연장하고 싶었다. 이건 나의 선택이었다.


당시 찾아오던 불안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때 내린 결론은 '돈'이었다. 어찌 보면 단순했고 직관적인 고민인데 애써 윤리적(?)으로 회피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평생 벌 수 있는 돈의 총량은 정해져 있고 나의 청춘과 에너지 총량도 정해져 있다. 내가 소모할 수 있는 시간 총량은 정해져 있는데 직장인이라는 유통기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갑자기 유통기한이 짧아지고 소멸될 수도 있으니까. 


'아 이거였구나.. 갑작스러운 유통기한 소멸에 대한 불확실성.'


돈을 열심히 벌고 있으면서 돈에 대한 걱정을 마음 한구석에서 여전히 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왜 나는 이런 것일까? 이 문제를 풀어보려면 어떨게 해야 할까. 그런데 객관식 문제면 선택할 몇 개의 답이 보일 텐데 선택지 자체가 안 보인다. 완전 주관식이란 말인가. 이게 과연 진솔한 과제나 삶의 목표가 될 수 있나.. 양심의 소리까지 들려온다. 


'삶의 가치를 추구해야지 무슨 돈을 좇나..'

'도대체 넌 뭐를 좋아하니? 돈에 관심이 있으니 이걸 목표로 프로젝트까지 해?'


그때 당시 팀장이 한 말이 생각난다. "연봉 차이는 나지만 시간이란 자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넌 그 시간 자산이 아주 많다" 그렇다. 내가 선택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것은 '시간' 뿐 아닐까. 내가 기대하는 Output은 '돈'이다. 그리고 Input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다. 돈은 부족하고 시간이 많으니까. 


그럼 어떤 효과적인 Process를 만들어야 할지 또 선택해야 했다. 답지는 잘 안 보이지만 이건 계속된 나의 선택이다. 그래서일까. 정해진 정답지란 원래 없어 보였다. 만들기 나름이라면.. 누구나 이런 프로젝트를 어디선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늦었을까.'


'어쨌든 My 프로젝트를 해보자. 근데 프로세스는 어디 있지?'




이전 06화 연봉은 시간을 잘 보내면 오른다(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