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지해 주는 파트너가 있는가
아내와 주말에 모델하우스를 보러 다니려면 뭔가 장치가 필요했다. 우선 주말 드라이브 개념이 필요하니 그때그때 괜찮은 코스를 개발해야 했다. 중간에 뷰맛집이나 카페를 연결하는 식이다. 다행히 나는 이런 거를 좋아한다. 새로운 장소, 낯선 공간을 찾아갈 때 잠시 머리가 비워지는 느낌과 약간의 몰입이 좋다. 내가 혼자라면 이런 일들을 재미있게 할 수 있었을까? 옆에 아내가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아내는 원래 아침잠이 많은 편이고 천성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초기엔 어디 다니다 보면 아내는 조수석에서 어느덧 잠들어 버리고 나 혼자 쫑알거릴 때가 많았다. "아니 잠 좀 그만 자면 안 되나.. 차만 타면 자냐.", "다 듣고 보고 있으니까.. 도착하면 깨워.", "이럴 바엔 혼자 다니는 게 더 편하겠어!", "그래? 그럼 그리 해보시던가. 당신 혼자 무슨 재미?"
어쨌든 주말에 아내와 함께 하는 '공식적인 시간'이 많아져 좋았다. 어린 아들도 어딜 가든 목적지는 몰라도 차만 타면 좋아하니 나들이 삼아 여기저기,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자동차'라는 이동 공간은 '집' 다음으로 체류시간이 많은 제2의 공간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집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다. 음악을 들으며 새로운 경치와 장소를 보면 시시콜콜하고 소소한 대화가 쉽게 이어진다. 다양한 장소와 시간들이 이런 '티키타카'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었다. 매 순간들은 씨줄과 날줄이 되어 추억을 엮어갔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란 없다.'
쳇바퀴 도는 일상에 성격이 조금은 다른 '투자'란 섹션도 조금씩 모양을 만들게 되었다. 집에 대한 생각, 앞으로 자산을 키워 보겠다는 내 고민을 아내와 나누며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다. 서로 눈높이가 비슷해야 앞으로 어려움이 닥쳐도 파트너로서 서로 힘이 되니까. 하지만 아내는 나보다 매우 '현실 안정' 추구형 타입이다.
"부동산이란 게 무슨 복부인들이나 하는 거지.. 난 그쪽은 관심 없어", "다른 집은 남편보다 부인들이 이런 쪽에 훤해. 아내가 주도한다는데..", "난 몰라, 같이 구경하고 다니는 건 좋은데, 결정은 당신이 알아서 해. 책임은 당신 몫이야"
'그래 선택과 결정은 다 내 책임이지..'
직장을 다니며 '부캐'로 생소한 부동산 분야를 공부하고, 돈이 들어가는 투자를 결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저기 부동산 임장을 다니며 책에서 읽은 내용을 현장에 적용해 보려 했지만 감이 없었다. 어설픈 책상머리 지식은 나 혼자만의 스토리에 빠지게 한다. 2006년 후반 부동산 시장이 타 올랐다. 내가 살던 분당의 아파트도 가격이 계속 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2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중대형 평형으로 갈아타고 싶어졌다. 모든 언론에서 중대형 아파트가 앞으로 대세라고 떠들 때다. 분당 안에서는 가격 차이가 너무 커서 평형대를 넓힐 수가 없었다. 마음은 조급했다.
'맨날 알아보고 생각만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분당 남쪽인 용인 수지일대와 동쪽인 경기도 광주 쪽에서 중대형 아파트 분양을 많이 하고 있었다. 중대형은 가격이 비쌌지만 분당 20평대 아파트를 팔고 추가 대출을 받으면 가능했다. 새로 생기는 전철 연장라인을 따라 사면 무조건 오를 거 같았다. 그런데 나는 서울 출생인데 도시보다 자연을 좋아한다. 나중에 뼈아프게 체감했지만 멋진 자연과 부동산 투자 가치는 서로 연관성이 낮은 편이다. 경제와 사회 그리고 심리적인 변수까지 고려한 복합적인 변수를 이해하지 못할 때다. 그때는 경치 좋은 곳, 특히 '배산임수' 이런 콘셉트 있는 아파트가 희소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예부터 집은 무조건 배산임수라 하지 않았나?' 여기에 전철 호재까지 있다면 제법 안전장치도 갖추었으니 가치가 상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내와 상의했다. 한번 큰 평수 아파트 분양을 받아서 쾌적하게 살며 돈도 벌어보면 어떠냐고. 하지만 아내는 반대했다. "분당을 나가기 싫은데.. 여기서 기회를 찾아보자", "분당 가격을 내 월급으로 따라가긴 힘들어. 대출 금액도 더 커지고", "나는 여기 작은 아파트도 좋은데 굳이..", "이제 대형 평형 아파트가 대세야. 분양가의 10% 계약금만 있으면 되니까, 정 아니면 나중 분양권으로 팔자", "쉽게 될까.. 그런 거 해봤어?"
쉽게 될 리는 없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라며 나를 달랬다. 뭔가 해야 한다는 다급함도 있었지만 '나의 가설'을 실행해 보고 부딪혀 보고 싶었다. 용기인지 호기심인지 일단 결과가 궁금한 것이다. 그래서 분당과 10여 킬로이상 떨어진 곳의 45평 새 아파트를 덜컥 분양받았다. 배산임수 풍광에 미래 전철 호재도 있으니 그때는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의 보물상자 같았다. 너무나 확실한 선택으로 보였다. '그래 도전하는 자만이 기회를 선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은 큰 손실로 돌아왔다.
2008년 후반으로 들어서며 수도권의 부동산 시장은 하락하며 침체기에 들어갔다. 내가 분양받은 아파트는 입주 때까지 미분양이 되었다. 준공 후까지 미분양된 아파트는 제대로 된 시세가 형성되지 않는다. 입주가 다가오자 마이너스 P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분양가의 10%인 계약금만큼 마이너스가 생겼다. 웬만한 직장인 연봉 수준의 돈이 마이너스라니.. 피할 방법이 없을까?
결론은 피할 수 없었다. 책임져야 했다. 수천만 원의 돈을 포기하던가 아니면 입주해서 들어가 살면서 높은 이자를 부담해야 했다. 집값이 분양가보다 빠진 상태에서 이자만 늘어나니 들어가 살 맛도 나지 않았다. 현실은 냉혹했다. 나는 아내와 상의했다. 내가 믿고 상의할 사람은 부동산 비전문가인 아내밖에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런데 아내의 결론은 명쾌하고 단순했다.
"아니 무슨 부동산 공부는 한참 하더니.. 이게 뭐야. 그 계약금이 얼만데 포기해? 그냥 들어가 살아."
"그게 여기 아직 주변에 편의시설도 없어.. 아이도 전학보다는 차로 데려다줘야 할거 같고.."
"근데 당신은 이런 고생도 없이 처음부터 잘 될 거라 생각했어? 여기서 하나라도 건져 나가야지"
"뭘 하나라도 건져.."
아내는 내 첫 부동산 프로젝트의 유일한 지지자였다. 그녀도 이번 프로젝트에 실망했지만 상황을 피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나보다 단호했다. 우리는 고민 끝에 분당집을 전세 놓고 낯선 곳으로 들어갔다. 정 붙이고 살면서 손해를 줄여 보려고 버텼다. 집은 크고 경치도 멋졌지만 집값은 분양가 밑으로 한참 내려갔고 매수세가 없어 팔기도 어려웠다. 기다리던 전철 호재도 계속 연기되어 언제 완성될지 오리무중이었다. '아..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하나..'
그런데 2010년대 중반부터 수도권 시장이 겨우 살아나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서 가격이 상승 중인 분당으로 다시 옮겨 탔다. 과감한 손절과 새로운 매수를 통해 시장의 '상승 사이클'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실패한 프로젝트 탈출을 위한 이 선택은 결국은 '기사회생' 측면에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 첫 분양 아파트는 분양가 대비 '억대'의 큰 손실을 보며 매도해야만 했다. 첫 프로젝트는 장부상 큰 마이너스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 몇 년간 아내와 함께한 시간들이었다. 이 투자가 '왜 실패했는지' 그리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많은 고민과 대화가 있었다. 아픔과 함께 내공이 깊어졌던 시기다. 이런 시기도 꼭 필요한 '투자 시간'의 일부였음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집을 팔고 나오며 아내가 말했다.
"이제 당신 프로젝트는 멈출 수 없어, 이 손해를 몇 배로 갚을 때까지.."
"정말 미안해.. 앞으로 몇 개나 성공시켜야 할까. 감이 없네.."
"이번엔 이 정도로 막았으니 다행인데 뭐, 다시 해봐 내가 기다려 줄게^^"
첫 프로젝트에서 확실히 얻은 한 가지는 '나의 영원한 인생 파트너가 누구인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