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남은 햄버거를 챙겼다. 두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번 살핀 후 모두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 타야 하는 거리는 90km. 짧지 않은 거리. 목적지는 낙단보. 새벽에 일어났을 때 허벅지가 많이 당겼지만 평지 위주라서 크게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침 8시 30분경. 우리는 낙동강줄기를 따르는 자전거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앞으로 쭉쭉 잘 나갔다. 나는 맨 뒤에서 따랐다. 그리고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아, 내 무릎과 허벅지. 그래도 끝까지 갈 거다.
낙단보를 향해 가던 그 길은, 뭐랄까, 가을을 꽉꽉 눌러 담은 것 같았다. 가을을 어느 땅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그 한가운데를 지나는 길이었다. 하늘은 맑고 높았으며 구름은 하얗고 두꺼웠다.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아쉬운 풍경들이었다. 그 풍경들이 내게 멈춰서 사진을 찍으라고 시켰다. (무릎과 허벅지가 시킨 게 아니다.) 나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후 사진을 꺼내보면 나는 사진을 찍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사진을 찍을 때 주변의 환경, 바람, 햇볕, 그림자 같은 것들이 떠오를 것이다. 사진만 남는 게 아니라 프레임(틀) 밖에 있는 것들, 내가 몸으로 경험한 그 순간들이 사진 뒤에서 함께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그 순간의 느낌들도 희미하게 떠오른다. 사진 뒤에서 그 풍경을 찍고 있는 내 모습도. 그때는 벅찼고 지금은 아련하다. 풍경 덕분이었을까. 실제로는 7시간 정도를 달렸지만 체감상으로는 3시간 정도 달린 것 같았다.
낙단보인증센터에서 수첩에 도장을 찍었다. 이제 남은 건 숙소까지 가야 하는 5km 정도 거리. 내비게이션을 사용하느라 내가 앞장섰다. 숙소가 있는 마을이 가까워오자 들판이 펼쳐졌다. 금빛이었다. 다행이었다. 우리가 거기 닿은 때가 추수를 하기 전이어서. 도시에서 생활하는 우리가 그 넉넉한 들판을 언제 또 마주해 볼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하면 마을 어귀에 의자 하나 갖다 놓고 앉아서 푹 빠져들어 보고 있어도 좋았을 걸 싶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 이름은 낙단보자전거민박. 이름 그대로 자전거 여행자들을 위한 곳. 지붕에는 자전거 세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 자전거들이 민박집 간판인 셈이었다. 마당으로 자전거 거치대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주인 내외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라 들었다. 거치대는 단순하게 생겼지만 허투루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자전거를 들어서 안장을 걸쳐 거치하는 방식이었는데 안정적이기도 했고 자전거를 바닥에 세우는 것보다 공간도 훨씬 절약됐다. 각 자전거를 넣고 빼는 데도 편했다. 안장 높이, 자전거 사이의 간격 등도 고민하셨을 것이다. 자전거여행 그리고 자전거 여행자들에게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숙박비에는 저녁식사와 아침식사가 포함이었는데 그 한 끼에도 진심이 담겨 있었다. 고단한 여행자들에게는 더할 나위가 없는 끼니였다. 구름, 들판, 하늘, 자전거, 넉넉한 인심, 진심. 우리는 그날 가을 한가운데 있었다.
10월 11일이 밝으면 우리는 문경을 향할 것이다. 낙동강과 헤어질 것이며 이화령을 넘기 전에 숨을 고를 것이다. 이화령을 넘으면 드디어 충청북도에 닿게 된다. 우리 여행의 첫 번째 장이 끝나가고 있었다.
참, 얘들아. 이화령 넘기 전에 숨만 고르는 건 아니고 글도 써야 돼.
아휴, 고맙다는 인사는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