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ienvorbereitung Visum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계획했던 일의 80%는 현실에 부딪혀 좌절되거나 이룰 수 없는 마땅한 변명을 찾아내면서 그저 꿈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내가 자격증만 따면 독일에서 한국어교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베를린 관광책자는 뚝딱 만들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여행분야 파워 블로거의 꿈은 귀차니즘으로 물 건너갔고 독일인 남자와의 연애는커녕 친구 한명 제대로 사귀지 못했다.
급하지 않은 성격은 나태를 낳았고 나태는 불안을, 결국 불안은 후회로 번졌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베를린의 4계절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나는 여행객에 불과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그저 계획했던 일을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토록 바라던 베를린에서의 시간을 마음대로 허비한 것에 대한 후회일 것이었다.
비자를 연장하는 데에 문제가 돈 뿐이라면, 돈은 구하면 되는 거였다. 이 과정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한 건 사실이었다. 돈 10만원에 울고 웃었다. 가진 게 없었기에 돈에 연연하며 살지 않았던 지난날들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눈물 속에 잠들면서도 머릿속에는 ‘무조건 베를린에 남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비자연장에 필요한 돈을 다 모은 후 본격적으로 비자 준비에 들어갔다. 내가 받을 수 있는 비자는 학생준비비자(Studienvorbereitung Visum)로 어학을 공부할 수 있는 1년+ 대학 입시를 준비할 수 있는 1년, 총 2년이 주어지는 비자였다. 비자의 기간은 어떤 공무원을 만나느냐, 어떠한 서류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줄어들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독일에 ‘언제나’라는 건 없다.
학생준비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1년 간 베를린에서 무사히 살 수 있는 만큼의 돈이 들어있는 계좌(Sperr Konto)가 필요했다. 금액은 물가를 반영해 달라질 수 있으며 입금해둔 돈은 매달 일정량만큼만 인출이 가능하다.
돈과 서류를 준비해도 비자청과 약속을 잡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어쩌면 계좌를 만드는 일보다 약속을 잡는 게 더 어려운 일일수 있다. 운이 좋으면 홈페이지에서 원하는 날짜에 예약이 가능하지만 1년 이후까지 모든 예약이 완료된 예약 페이지를 보고 있으면 답답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 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현장예약을 해야만 했다.
현장예약은 새벽 4시부터 진행이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현장예약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언제 줄을 서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추운 날씨 때문에 새벽 5시 즈음 도착했는데도 예약번호를 받을 수 있었고, 다섯 시간 정도를 더 기다린 후에야 비자청 직원과 면담을 할 수 있었다. 까다로운 직원을 만나면 심한 경우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늘 그렇듯 나의 걱정은 기우로 끝이 났고 별다른 문제없이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거주지 등록, 계좌 개설, 어학원 등록, 비자청 면담 후 비자를 받기까지 두 달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부탁이나 도움을 청할 일은 만들지 말자는 신념으로 살아왔는데 내 의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자존심은 물론이고 인생관 전체가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신기한 건 그런 와중에도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남아야 하나’라는 생각보다는 이렇게 해서라도 남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여러 사람 신경 쓰게 해?”
베를린에 오기 전 엄마 친구가 용돈을 주셨다는 말을 전해들은 아빠의 반응이었다. 아빠의 핀잔이 떠오르는 걸 보니 일단 큰 일 하나는 해결했다는 안도감과 또 하나의 큰 산이 남아있다는 압박감이 한 데 뒤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