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한다.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작고 조용한 존재가 하나 살고 있으면 좋겠다고. 내가 아무 말 없이 울고 있을 때, 그 존재가 다가와 말없이 내 손을 꼭 잡아줬으면 좋겠다고.
예전엔 밖에서 찾았다.
나를 위로해줄 사람.
나를 사랑해줄 사람.
하지만 그게 쉽지 않더라.
온전히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처음엔 좀 슬펐고, 지금은 조금 덜 슬프다. 왜냐하면 그 ‘나’ 안에 분명히 누군가가 살아 있고, 그 누군가는 절대 나를 버리지 않으니까.
모두가 잠든 후 조용히 울 때
마음이 요동치지만
이내 곧 잠잠해진다.
그렇게 슬픔은 눈물과 함께
나를 위로해준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은
처음엔 쓸모없고 방해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주인공 라일리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할 때, 그녀 안의 '기쁨이'는 계속해서 긍정적인 감정만 유지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결국 라일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슬픔이었다. 기억 속에서 울고 있는 나를 껴안아준 건,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었다.
슬픔은 내 삶에서 배척되지 않아야 하는 존재라는걸
슬픔도 같이 안고 가야하는 존재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나는 가끔 눈물에 익숙한 나 자신이 싫기도 했다. 왜 나는 이렇게 잘 우는 걸까. 왜 나는 이렇게 쉽게 무너질까. 그러다 문득, 그 눈물이 나를 무너지게 한 게 아니라 견디게 만든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
우울과 짜증이 극에 달했을 때
눈물을 흘리고 나면
비로소 다시 보통의 감정들이
하나씩 채워진다.
극에 달했던 감정이 눈물로 빠져나가고 나면
슬픔은 위로로 천천히 변해갔다.
그렇게 슬픔은, 나를 무너지게 한 게 아니라
끝까지 견디게 만들어준 감정이었다.
울지 않고 버텼던 날보다 울고 나서 다시 고개를 든 날이 더 많았다. 슬픔은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감정이 아니라 가장 솔직하게 나를 꺼내주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이젠, 슬퍼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슬퍼서 멈춘 게 아니라 슬퍼서 다시 걸어갈 수 있었다고.
누군가를 위로할 때는 ‘기운 내’라는 말보다 ‘슬퍼도 돼’라는 말이 더 힘이 된다. 슬픔은 약한 감정이 아니라, 회복을 시작하게 만드는 첫 번째 신호다. 나를 감싸안고 한참을 울게 해준 감정, 슬픔은 그렇게 내 안에서 가장 조용하고 따뜻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지금도 슬픔을 안고 간다.
아마 앞으로 계속 그렇게 슬픔은
내가 우울할 때 나를 위로해주겠지.
너무 힘들어 무너지고 싶을때
나에게 다가와 '눈물'이라는 약을 처방해주고
위로를 선사하겠지.
더 깊은 어둠에 빠지지 않게,
지금의 나를 다정히 끌어안기 위해서.
기억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억을 선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엔 영화 <컨택트> 속 루이스 박사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다가올 아픔을 이미 알면서도, 그 미래를 선택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어떤 기억이 깃들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