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햇살이 스며들던 어느 오후, 함께 웃고 걷던 사람의 뒷모습. 누군가 나에게 소리치던 모습.
이불 속에서 혼자 눈물을 훔치는 나의 모습.
왜일까. 앞으로 그런 일들이 또 나에게 찾아올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장면이,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미래는 알 수가 없다.
만약 정해진 미래가 안다면 나는 어떤 방향을 선택하게 될까.
미래를 바꿀까.
알면서도 그냥 지나갈까.
우린 기억을 통해 감정을 되새기고, 감정을 통해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 기억은 단순한 정보의 저장소가 아니다. 그건 내 감정이, 나를 통과해 지나간 자리다.
그리고 그 과거의 기억들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선택들을 해나간다.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든다.
어떤 기억은 아프다. 하지만 그걸 지우고 싶지는 않다. 그 기억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니까. 그 사람을 만나 웃고 울었던 시간들이 비록 끝이 정해져 있었다 해도, 나는 여전히 그 기억을 사랑한다.
영화 <컨택트>의 루이스 박사도 그랬다. 외계 언어를 이해하게 된 그녀는 시간을 선형적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는 감각을 얻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본다. 사랑하게 될 사람, 그리고 짧은 생을 마주할 딸의 운명까지. 하지만 그녀는 그 길을 피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사랑하고, 알면서도 낳고, 알면서도 웃는다.
그건 비극일까, 아니면 용기일까. 나는 종종 이 질문 앞에 머문다.
루이스 박사는 모든 미래의 기억들을
가지고도 그대로를 선택했다.
아마도 그녀는 불행한 기억 속에서
딸과 함께였던 행복의 순간들에
더 가치를 둔건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딸과의 시간은 없어지니까.
그 소중한 기억들을 잃어버리니까.
우리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다 알고 있는데도, 결국 아파질 걸 알면서도 그 길로 발을 들일 수 있을까. 루이스는 말없이 그렇게 했다. 그 모습에서 나는 묘한 위로를 받았다.
삶은, 어쩌면 끝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다. 우린 모두 언젠가는 이별하고, 언젠가는 떠난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사랑하는 게 인간이다. 기억은 아프지만, 그 기억 안에 있었던 사랑은 진짜니까.
때로는 나도, 그런 루이스처럼 선택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어쩌면 불행할지도 모르지만,
삶속 행복한 순간이 적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내 옆의 딸과의 시간을
온전히 보낼 수 있는 그런 삶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게 나의 정해진 삶을 따라갈 것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상처보다 사랑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탓하기보다, 그 기억을 만든 나를 안아주고 싶다.
기억은 때로 고통이지만, 그 기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된다. 기억은 나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은은한 불빛 같은 것. 아프지만 따뜻하다.
그런 따뜻함이 미래의 길을 따뜻하게 만드는거 아닐까.
그래서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딸과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어쩌면 또다시 아파할 걸 알면서도, 다시 기억될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건넬 수 있다.
딸과, 가족들과 함께. 그게 인간이고, 그게 살아가는 일이다.
그게 나의 삶이다.
그게 내가 걸어갈 길이다.
<그 말 한마디가, 나를 다시 살아가게 만들었다 – <캐롤>의 테레즈 - 용기> 때로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삶을 바꾼다. 망설임 속에서 조용히 용기를 꺼내는 순간, 그때 비로소 나를 다시 살아가게 만든다. <캐롤>의 테레즈가 건넨 그 시선, 그 선택. 마지막 이야기에 테레즈의 이야기를 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