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잘했어야지.."
요즘 울지 않고 등원하기가 최대의 숙제다.
일단 아침에 울고 가면 하루 종일 툭하면 울게 되고 바지에 실례를 하는가 하면 짜증도 많아진다.
채아는 감정이 한번 무너지면 스스로 채워져 있던 어떤 감정 절제의 빗장이 열리는 것인가!
나도 물론 아침부터 그 난리를 피우고 나면 진이 빠지고 하루 종일 기분도 안 좋다.
어제는 심기일전으로 여러 가지 미끼를 던져놓고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며 느긋하게 등원시켰다.
초콜릿, 젤리... 일단 울음 막이용을 두둑이 챙기고 자전거길도 새로운 길로 돌아가고 아침부터 장난치며 계속 말 걸고 울려고 감정 잡는 채아를 방해했다.
어제의 결과는 성공. 일단 유치원 문은 보는 순간 "싫어!"가 나오던 엊그제와는 다르게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오늘.... 너무 내가 안일했나.
일분이라도 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내가 너무 서둘렀나.
유치원 문 앞에서 아이만 들여보내는 걸 보고 '아 이번 주부터는 신발장까지 못 들어가겠구나' 싶어 아이만 들여보낸 게 화근이었다.
채아는 영문을 모른 채 담담하게 신발을 혼자 벗고 신발장까지 넣는 것까지는 미션 클리어.
그다음부터는 얼음이 되었다.
아뿔싸. 유리창문에서 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같은 반 친구 엄마가 아예 신발장에 철퍼덕 앉아 아이와 노닥거리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얼어있는 채아에게 손을 뻗어 친한 척도 하고... 자연스럽게 채아는 자기 엄마를 찾는 것 같았다.
채아를 이끌어 계단까지만이라도 인솔할 사람이 있었다면..
그러나 원감 선생님도 다른 아이에게 눈이 팔려있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채아에게 다가갔는데 나를 만난 채아는 울먹울먹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아 이런... 마이쭈를 입안에 욱여넣어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달콤함도 서러움을 이길순 없었나 보다.
그제야 원감님은 목놓아 우는 채아를 끌고 계단으로 가신다...
옆에 계시던 봉사해주시는 분이 "아이 잘 들어갔는데 왜 울지? 엄마가 빨리 갔었어야지!" 하신다.
내 잘못인가?
나는 잘하려고 한 건데 내가 잘못한 건가?
왜 다 엄마 잘못인 거지?
제일 노력하고 제일 같이 울고 싶은 게 엄마인데 그것도 부족한 엄마인 건가?
(그래. 규정에 맞게 문 앞에서 아이만 들여보낸 내가 잘못이다.)
나는 최대한 내 아이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게 내 아이에게도 좋은 생각인 거고 배려나 존중을 자연스럽게 체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그렇지 않은 엄마들을 '벌레'처럼 칭하는 것도 너무나 싫고 무섭다. 생각해보면 엄마가 아이를 최대한의 관심으로 보살피는 건 유전자가 준 본능이다. 종족을 보존하고 잘 길러내는 것. 주위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을 일부러 무시하는 게 아니고 그 순간 내 아이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신발 장안까지 들어가 자기 아이와 함께 간식을 나눠먹고 한참 동안 수다를 떠는 것. 그것이 그 순간 그 엄마와 아이에겐 아주 행복하고 좋은 순간이었을 거다. 채아를 울리려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니까. 그 순간 그들은 다른 것들은 아예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그 엄마를 잘못했다고 비난하는 건 아니다. 그럴 수 있으니까. 나도 그럴 수 있으니까. 너무 자기 아이를 특권처럼 생각한다거나 민폐의 프리패스쯤으로 생각하는 몰상식한 사람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모성이라는 본능에 반하여 무조건 적으로 엄마들을 무시한다거나 잘못의 책임을 묻는다거나 하는 것은 엄마들에게 큰 상처 일수 있다. 이미 엄마들은 일상적으로 희생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엄마들은 순간순간 정말 잘하고 싶어 하고 지나간 일들의 후회도 많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