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05 Bern
오늘은 베른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한 날이다.
우리 부부에게 베른은 두 번째 방문이다. 첫 방문은 신혼여행 때였다. 당시 베른에서 1박을 했다. 하지만 실제 구경한 시간을 반나절 정도. 신혼여행을 와서 뭐 그리 바쁘게 돌아다녔는지, 베른이란 도시의 매력을 느끼기엔 한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베른으로 향하는 9시 30분 기차를 타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기상했다. 기차 시간이 많이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바젤역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우리는 부지런히 준비를 시작했다. 나와 아내는 어제 먹고 남은 카레를 간단히 먹었지만, 아이들까지 먹일 시간을 안됐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 먹을거리를 챙겨 호텔을 출발했다. 역에 도착해 아이들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급하게 사고, 출발 몇 분 전 기차에 겨우 탈 수 있었다.
아침부터 너무 정신이 없었나 보다. 아직 베른 근처에도 못 갔는데, 벌써 지친다. 게다가 역에 너무 늦게 온 탓인지, 기차에 앉을자리도 마땅치가 않았다. 기차 안에서 한참을 돌아다니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 1시간가량 짧은 이동 시간이지만, 온이가 최근 부쩍 기차나 트램, 버스 안에서 가만히 있질 못한다. 밥과 간식을 주고, 놀아주는 등 여러모로 달래 보려 노력했지만, 온이 녀석도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힘든가 보다.
벌써 걱정스럽다. 베른 여행을 계획할 무렵, 무슨 용기가 났는지 베른에서 돌아오는 기차를 저녁 7시 30분 기차로 예약해놓았다. 좋든 싫든 베른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 중간에 힘들다고 호텔로 돌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은 막연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생긴다. 과연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기차 안에서 하루 같은 한 시간을 보내고서 베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벌써 시간이 너무 안 가는 느낌이다.
베른에서 첫 목적지는 바로 장미정원. 신혼여행 때 베른에서 유일하게 방문했던 곳이다. 특히 장미정원 안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봉골레 파스타의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신혼여행 전엔 오일 소스 파스타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었다. 내게 파스타는 토마토 또는 크림 파스타가 전부였다. 하지만 장미정원의 봉골레 파스타는 내게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이후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갈 때면 항상 오일 소스 파스타를 먼저 찾게 됐다. 그 기억을 가지고 다시 장미정원에 방문하기로 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시내 1일 교통 패스를 샀다. 당일치기 여행이었기에 최대한 시간을 절약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른역 앞 정류장은 꽤 복잡하다. 장미정원으로 향하는 10번 버스를 어렵게 찾아 타고, 20분 정도 걸려 드디어 장미정원에 도착했다.
도착 후 우리는 멀리 보이는 베른 시내를 배경으로 삼아 간단한 사진 촬영에 돌입했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팠지만,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빛의 방향도 사진 찍기에 딱 좋아 보여서 서둘렀다. 장미정원에 올라오면 베른 시내 전경이 훤히 내다보인다. 탁 트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더운 날씨도 잠시 잊게 된다. 첫 일정이라 그런지 아이들 상태도 괜찮았다. 다소 위험해 보이기도 했지만, 난간에 올라 여러 장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구도를 잡고, 삼각대를 세우고, 초점을 맞추고, 아이들을 프레임 안으로 유도하고. 역시나 어려운 작업이 이어진다. 이렇게 하고서도 제대로 된 사진을 건질 확률은 극히 낮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컷만 더, 한 컷만 더. 세현이는 카메라에 얼굴을 부딪쳐 울고불고 난리 통이다. 그래도 워낙 풍경과 날씨가 좋아 마음에 드는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사진 촬영을 마치자마자 우리는 바로 옆 식당으로 발을 옮겼다.
기다리고 기다린 Restaurant Rosengarten.
우연한 기회, 잊을 수 없는 식사 한 번이 여행자의 발길을 다시 그곳으로 인도한다. 이곳이 바로 신혼여행 때 봉골레 스파게티를 먹고 반해 아내와 꼭 한번 다시 오자고 약속했던 곳이다. 그러면서도 정말 다시 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지는 못했다. 그것도 두 아들 녀석을 데리고 이곳에 오다니! 신혼여행 후 5년 만에 이곳에 다시 왔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로웠다.
식당 분위기나 느낌은 그대로였다. 우린 5년 동안 그리워했던 음식을 그대로 먹기 위해 메뉴판을 꼼꼼하게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봉골레 파스타가 보이질 않는다. 하필 메뉴판도 영어가 아니다. 번역기를 돌려가며 이래저래 고민하다 결국 종업원에게 물어보았는데, 아쉽게도 봉골레는 동계 메뉴인 관계로 현재는 먹을 수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럴 수가, 이거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영어 실력이 달려 아쉽다는 말 한마디 못 한 채, 다른 오일 소스 파스타와 로스티드 폭립, 감자튀김 등을 주문했다. 요리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이 조금 피곤해하는 눈치다. 식사를 마치고 어서 아이들을 재워야겠다. 드디어 기다리던 음식이 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메뉴는 아니었다. 맛은 괜찮았지만, 신혼여행 때의 기억과는 사뭇 달랐다. 메뉴 선택에 실패한 것일까. 우리 부부는 못내 아쉬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현이는 잘 먹는다. 게다가 비싼 가격만큼 양도 아주 많다. 우리는 다 먹고 남은 감자튀김을 포장한 후,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자리를 일어섰다.
장미정원 레스토랑 바로 옆에 아이들 놀 수 있는 놀이터가 있다. 아이들이 자고 일어나면 이곳에서 놀려줘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만 아이들이 놀이터 존재를 눈치챘다. 우리 아이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세현이가 먼저 놀고 싶다고 말을 꺼냈고, 아내는 아이들에게 지금 놀면 5분만 놀 수 있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놀면 놀고 싶은 만큼 놀 수 있다는 제안(협박)을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당연히 세현이는 지금 놀기를 택했다. 5분 후 낮잠 시간이 되었다고 아쉬워하며 우는 세현이에게, 낮잠 후 다시 오기로 약속을 하고서야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내려왔다.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 베른 시내에 있는 스타벅스로 이동했다. 이번 여행 내내 아이들 낮잠 시간이 부모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 되고 있다. 스타벅스에 들어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를 주문했다. 시원한 커피를 마시니 반나절 동안 쌓인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다. 다만 스타벅스 내부가 기대만큼 시원하진 않았다. 혹 아이들이 더워서 깰까 걱정되는 마음에, 우리는 실외로 자리를 옮겨 멍하니 베른의 어느 길가를 구경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으려나 세현이가 먼저 일어났다. 너무 이르다. 역시 조금 더웠나 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온이도 금방 따라 일어났다. 어떻게 형이 잠에서 깼는지 정확히 알아챈다. 참 신기한 노릇이다.
잠에서 깬 아이들을 둘러업고, 약속한 대로 장미정원으로 이동했다. 이번엔 놀이터 놀이 시간제한은 없다. 기차 시간도 여유 있었기에 우리는 여유롭게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바라본다. 여름에 여행하면 해가 길어 다행이다. 혹 겨울이었으면 벌써 해가 지고 있었을 터. 아이들이 정말 즐거워 보인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아이들이 저녁 먹으러 가자는 부모 제안에 순순히 응해줬다. 더 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다소 놀랐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우리는 재빠르게 짐을 챙겨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혼여행 때 장미정원에 왔다가 역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이번에도 유모차를 끌고 언덕을 천천히 내려가기로 했다. 해가 지기 시작해서인지, 날씨도 선선하니 너무 좋다.
장미정원에서 내려오는 길. 이색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베른 도심을 둘러싸고 아레강이 흐르고 있다. 강의 물 색깔은 짙은 에메랄드색이다. 신혼여행 때는 4월이었는데, 물의 색이 신기하다며 그냥 눈으로만 보고 즐기는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8월의 아레강에는 수영하는 많은 피서객이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봐서일까. 물살도 꽤 세서 위험해 보이지만, 다른 한 편으론 너무 시원해 보였다. 아내와 저기서 수영하려면 아이들이 몇 살이 되어야 할까 농담을 주고받으며 베른의 옛 도심 길을 걸었다. 번화가 상점에서 일명 맥가이버칼에 아이들 이름을 새겨 맞춰주려고 했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문을 연 곳이 없었다. 그나마 영업을 하는 곳도 문을 닫을 시간이라 하는 바람에 불가능했다.
시가지를 돌고 돌아 베른역에 도착했다. 아직도 기차 시간까지는 한참이 남아 있다. 역에서 저녁을 먹고 역 안을 구경하기로 했다. 메뉴를 고민하다 눈에 들어온 rice up. 결국은 또 여기인가. 혹 갈만한 다른 식당이 있는가 둘러보았지만, 마땅치 않아 보인다. 결국, 라이스업에서 비빔밥 하나를 주문하고, 옆 마트에서 샐러드를 사 와 식사를 시작한다. 다행히 역 안이라서 개별 식당 개념은 아니고, 마트 푸드코트 같은 개념이어서 외부 음식 반입이 가능하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기차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다.
기차 출발 시각을 기다리며 역 안 여러 상점을 구경했다. 아내와 둘이었다면 이런 시간마저도 좋았겠지만, 아이들과 여행 중엔 이런 자투리 시간이 특히 힘들게 느껴진다. 하루 일정을 보내고, 역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대기하는 시간. 특별히 할 일은 없지만, 아이들과 함께이기에 맘 편히 쉴 수도 없다. 게다가 낮잠을 짧게 자고 일어나는 바람에 피곤해하는 아이들. 아이들도 부모도 완전히 지쳤다. 역시 온종일 여행은 너무 무리였나 보다.
어찌어찌 출발 시간이 되어 기차를 타고 무사히 바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늦은 시간 바젤에 도착하여 역 앞 coop 마트에 들렀다. 내일은 큰아들 세현이의 생일이다. 이 먼 곳에 와서 자신의 세 번째 생일을 보낸다는 사실을 아이는 알까? 먼 훗날, 물론 기억하긴 힘들겠지만, 사진으로라도 자기 인생의 세 번째 생일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마트에서 아들 생일을 축하할 수 있는 초와 풍선을 샀다.
이후 버스를 타고 숙소에 복귀했다. 이제 아이들은 잘 시간. 세현이에겐 내일 생일 축하 파티를 위해 일찍 자자고 설득했다. 오늘 하루 피곤했는지 우려와 달리 아이들이 일찍 잠들었다. 덕분에 빨래도 하고, 짐 정리도 잘 마친 후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2018년 8월 6일. 부디 바젤에서 맞이하는 큰아들의 세 번째 생일날이 복되고 즐거울 수 있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