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06 Basel
큰아들 세현이의 생일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세현이의 생일이므로 오롯이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갖기로 했다. 마침 바젤 안에 동물원이 있어서 그곳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9시경 일어나 아침을 차렸다. 메뉴는 눌은밥과 닭고기 볶음. 여행을 떠나 오기 전 아이의 생일이 여행 중인지 미처 생각 못 했다. 미역국이라도 끓여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영 미안하고 아쉽다.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호텔 옆 슈퍼마켓에 들러 아이들 음료와 간단한 간식을 샀다.
바젤 도심에 Zoo Basel이라는 이름의 큰 동물원이 있다. 도심 자체가 그리 크지 않기에 우리는 트램을 타고 동물원으로 이동했다. 호텔에서 제공한 바젤 패스는 아주 유용했다. 교통은 물론 동물원 입장도 50% 할인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동물원에 입장.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엄청 더운 날씨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동물원 안에서의 시간이 그리 순조롭지는 못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온이가 유모차에 타지 않고 계속 걸어 다니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잘 걸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문제는 여전히 걸음이 서툴러 계속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본인이 힘들어지면 안아달라 요청한다. 그것도 아빠는 싫단다. 꼭 엄마를 찾는다. 여행 내내 이런 상황 때문에 아마 아내가 아주 힘들었겠지. 혹시 둘째가 조금 더 커서 혼자 잘 걸어 다니면 조금 나았을까?
동물원에서 세현이의 가장 큰 목표는 취리히 호수에서 만났던 백조를 찾는 일이었다. 우리는 지도를 보고 백조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지만, 취리히의 백조와 똑같이 생긴 종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 거대한 규모의 동물원을 샅샅이 뒤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꾀를 부렸다. 아들 생일을 축하하며 오롯이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갖겠다고 했지만, 있을지 모르는 백조를 찾기 위해 동물원 곳곳을 누비지는 못하는 걸 보면, 역시 좋은 아빠는 못 된다. 최대한 비슷하게 생긴 녀석을 찾고 세현이에겐 이곳엔 이 친구들뿐이라고 둘러댔다. 그리고 곧 취리히에 다시 가서 꼭 백조들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허풍을 떨었다.
백조를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날이 더워졌다. 이제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 우리는 점심도 먹고, 시원한 곳에서 쉴 겸 동물원 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구내식당은 매우 큰 규모였고, 음식 종류도 다양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외부 그늘에 있는 것보다 더 더운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그나마 가격이 저렴해 부담 없이 식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대학 식당처럼 먹고 싶은 음식을 쟁반에 덜고 계산을 하는 식이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조금 사서 식사를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더위 속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휴식은커녕 오히려 더 피곤해진 느낌이다.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아이들 낮잠 시간이다. 들어온 입구와 반대편 출구로 나오며 몇몇 동물을 더 구경했다. 그러고 보니 동물원은 정말 오랜만이다. 경험이 없으니 좋은 동물원과 그렇지 않은 곳에 대한 개념이 명확지 않다. 하지만 아내는 이곳이 꽤 잘 꾸며진 동물원이라고 칭찬했다. 아이들도 동물 보는 걸 좋아하는 눈치였지만, 부모 체력과 마음이 지쳐 금방 돌아가게 되어 미안했다.
트램을 타고 숙소로 복귀했다. 가족 모두 에어컨을 켜고 낮잠을 잤다. 그리고 4시경 세현이가 예상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잠시 후 온이가 잠에서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애초 계획대로 독일 지역으로 넘어가 물건을 사기로 했다. 원래는 그제 갔던 Weil de Rein 방면으로 갈까 하다가, 계획을 변경해 뢰어라흐(Loerrach)란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 이유는 Intersport라는 스포츠용품 판매점과 백화점이 있기 때문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는 아이들과 유니폼을 같이 맞춰 입고 싶었다.
뢰어라흐까지 가기 위해 트램을 타고 바젤 Badischer bahnhof으로 먼저 이동한 후, S-bahn을 타고 도착할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도시에 아이들과 오게 되었다는 사실이 재밌고 신기하기만 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경험만으로도 바젤에 방문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느낀다.
기대 속에 인터스포츠에 들렀지만, 시골 매장이어서인지 아이들과 함께 살만한 유니폼은 없었다. 우리는 바로 옆 dm 매장에 들러서 치약과 기저귀 등을 사고, 인근 약국에서 선물용 Voltaren 파스와 비오템 크림 등을 샀다. 역시 독일만 오면 이것저것 사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캐리어도 가득 차 있는 마법과 같은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래도 좋은 품질의 저렴한 제품이 많아서 즐겁기만 하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rewe에 들러 저녁으로 먹을 소고기와 치약, 초콜릿, (물론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케이크에 비교하면 보잘것없지만) 세현이 생일 케이크 등을 샀다. 여행의 막바지, 우리 부부에겐 소중한 장소 rewe에 들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고민이 시작됐다. 과연 저녁을 먹고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들어가서 먹을지. 사 먹기엔 경제적인 문제도 있지만, 저녁 시간이 너무 늦어지면 아이들에게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내 입장은 그냥 먹고 들어가는 게 좋겠다는 쪽이었고, 아내는 들어가서 차려 먹고 싶은 눈치였다. 고민 끝에 들어가서 먹기로 결정. 먼 길을 돌아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아내가 아이들 씻기는 동안. 나는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고기를 사본 이들은 알겠지만, 가격 대비 고기 품질이 뛰어나다. 2014년 독일에서 생활할 당시 우리 부부는 독일어를 할 줄 몰랐다. 분명 고등학교 시절 2 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는데, 하물며 마트에 가서 고기를 사는 것도 내겐 꽤 어려운 일이었다. 요즘이라면 번역기를 사용해 금방 고기가 어떤 부위인지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시절 우리 부부에겐 그것 또한 어려웠다. 한 번은 소고기를 먹겠다고 사 왔는데, (분명 우리 눈에 익숙해 보이는 부위라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이어서 전부 버린 일도 있다.
하지만 용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살 수만 있다면 싼값에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다. 우리는 번역기 덕분에 오랜만에 소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아이들도 오랜만이어서 맛있었는지 아주 잘 먹는다. 결국, 아내 의견에 따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식사 후 정리를 해야 한다는 사실. 너무 많이 차린 걸까, 정리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듯싶다. 우리는 먼저 세현이 생일 축하 파티를 하기로 했다. 시간이 늦어져서 아이들 자야 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먹은 것을 부엌으로 옮기는 사이 아내가 침대 위에서 아이들과 풍선을 꾸미고 케이크를 준비했다. 세현이 세온이 둘 다 무척 신이 났다. 알록달록 풍선을 이곳저곳 붙여주니 즐거운가 보다. 온이가 조금 흥분이 되었는지 침대에서 뛰어다니다 케이크를 부숴놓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즐겁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세현이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세현이는 침대 위에서 춤까지 추고 난리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진이 온통 호텔 방 안에서만 찍은 것으로 나온다는 점. 밖에서 세현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영상이라도 남겨 주었다면, 평생 남을 특별한 생일이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이들을 재우고, 아내와 나는 설거지와 짐 정리 시작. 12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저녁을 먹기 위해 아내와 의논을 하던 중, 내 딴에는 내가 양보해서 아내의 의견에 따른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내는 큰아들 생일상이라도 차려주고 싶었던 마음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키우며 아빠의 마음과 엄마의 마음이 다르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오늘도 그렇다. 나는 아이들이 저녁을 늦게 먹을까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사실 따지고 보면 배고픈 아이들이 혹여나 짜증을 부리고 부모를 힘들게 하진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반면 아내는 아들 생일에 좀 더 맛있는 것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게 엄마의 마음일까. 성 역할에 대한 많은 논의와 상호 간의 갈등이 문제화되는 요즘. 조심스럽긴 하지만, 다른 것은 다르다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성숙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