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나, 여행을 준비할 때. 여행을 하면서도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여행 내내 짐을 풀고, 다시 싸고, 도시를 이동하며 아이들을 챙기기만도 힘겨웠으니까. 부모가 가고 싶은 도시가 너무 많았다. 도시 이동이 잦다 보니, 과정이 참 힘들었다.
힘들어도 간단한 기록은 남겨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여행 전 동료 선생님으로부터 스마트폰과 컴퓨터에서 연동 가능한 노트 프로그램 하나를 추천받았다. 덕분에 여행 중간 간단하게나마 끄적일 수 있었다. 매 순간을 기록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메모를 남기고, 사진을 찍고, 밤마다 기억을 더듬어 가며 3주 동안의 우리 가족의 모습을 남기고자 노력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을 떠나 사진을 남기고, 그것을 소재로 글을 쓰는 과정은 내게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이전엔 여행을 다니면서도 그러질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여행과 사진,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근래의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 다니던 1990년대, 대학 생활을 했던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해외여행이 지금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항공권 가격도 비쌌고, 여행 정보를 얻으려면 시내 대형 서점에 직접 가야 했다. 서울에서 여권을 만드는 일도 종로구청에서만 가능했던가? 여러모로 번거로운 과정이었다. 일본 여행 가보겠다고 친구와 일본 대사관에 비자 신청을 하러 갔던 기억도 있다. 해외여행, 그것도 자유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낯선 일이었다. 여행 한 번 가는 것도 그럴진대, 하물며 거대한 크기의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일은 사진작가나 기자가, 글을 쓰는 건 그저 직업으로 작가라는 명함을 가진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비교적 운이 좋았다. 중학교 3학년 여름, 우연한 기회에 친구 2명과 일본 배낭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서울역에서 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에서 고속 페리를 타고 일본 후쿠오카로, 다시 하카타역에서 일본 오사카까지 밤 기차로 이동. 이 코스의 왕복 일정이었다. 그것도 1주일 동안. 일본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일정이 얼마나 무모한지 단번에 알아챌 것이다. 왜 아무도 말리지 않았을까. 혹시 그 누구도 우리 계획이 무모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여행을 허락해준 세 집안 어른들이 참 대단하다고 느낀다. 아들들이 밥 못 먹을까 봐서 김치며 여러 반찬을 대형 아이스박스에 싸 주셨던 걸 생각하면 걱정스럽긴 했던 모양인데. 그 어린 녀석들을 뭘 믿고 보낼 수 있었을까.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마치고선 친구와 2주 동안 일본을 다녀왔다. 이번엔 비행기를 탔다. 오사카에서 도쿄를 거쳐 홋카이도까지. (똑똑한 친구 녀석 지분이 더 크긴 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친구와 함께 계획을 짜고, 예약을 완료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을 통해 배낭여행의 재미를 알게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내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최근이지, 그전부터 여행을 좋아하긴 좋아했었던 거 같다.
학교에서 여행 작가를 꿈꾸는 아이들을 종종 만난다. 그런 아이들을 만날 때면 선생님도 사실 여행 작가가 되고 싶다고 속내를 말하곤 한다. 내가 학교 다닐 땐 여행 작가라는 직업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 내 꿈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직업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기야 만약 알았더라도 여행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면, 부모님이고 선생님이고 반대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여행은 대중화되었고, 좋은 카메라(스마트폰 카메라는 또 얼마나 훌륭한가)를 사용하는 것도 일상이 돼버렸다. 마음만 먹으면 글을 써 책을 내는 일도 누구나 가능한 시대이다. 그 덕택에 나도 여행을 가 사진을 찍고, 글을 남겨 책으로 만들 수 있게 됐다. 더 일찍 넓은 세상에 눈뜨지 못해 아쉽기도 하지만, 지금에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것이 참 다행이라고 느낀다.
무엇보다 교사이기에 방학을 이용해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어 참 감사하다. 처음 교사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런 부분까지 고려하진 못했다. 적어도 그 시기엔 내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긴 여행을 갈 수 있는 시간 여유는 내게 참 소중하다. 물론 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다니다 보니 날씨는 대체로 덥거나 춥고, 성수기라 여행비용이 올라간다는 사실은 아쉽지만. 오랜 시간 먼 곳을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 책은 2018년 여름 우리 가족의 유럽여행 과정을 두서없이 쓴 글이다. 글의 정체성이 불분명하단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도움이 될만한 여행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인지, 그저 아이 키우는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그냥 혼자만의 넋두리인지 여전히 헷갈린다.
사실 나와 내 가족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무척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과정이 너무 즐거웠다는 사실이다. 나는 보통 여행 준비 과정에서 큰 즐거움을 느낀다. 실제 여행보다 준비 과정이 더 즐겁다고 느낄 때도 있다. 반면 여행을 마칠 때는 아쉬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행 후 글을 쓰며, 여행을 준비할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 사진을 뒤적거리며 아이들 어렸을 때 모습을 살피다 보니 웃음이 나고, 마음도 따뜻해진다. 꼭 지금 다시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도 아내와 두 아들이 이런 느낌으로 여행을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진만으로는 완전치 않으니까. 이 즐거움이 나 혼자만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첫아들 세현과의 첫 해외여행, 호텔에서 (2016.2. 대만 타이베이) / 세현과 엄마, 그리고 뱃 속의 세온이 (2017.1. 일본 오키나와)
이전에도 아이들과 종종 여행을 다녔다. 아이를 데리고 간 첫 여행은 첫째 세현이 6개월 무렵. 대만 타이베이와 일본 오키나와 여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6개월 된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다녀왔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타이베이 이곳저곳 아기 띠를 하고 걸어 다닌 기억뿐이다. 당시 이 녀석이 유모차도 잘 안 타려고 했다. 여행 첫날 아기띠를 한 채로 지우펀에 다녀온 후, 자다가 다리에 쥐가 난 기억이 떠오른다.
세현이 돌 무렵엔 애초에 가려고 했던 유럽여행을 취소하고, 일본 규슈 지방 여행을 다녀왔다. 당시 유럽에 가려고 비행기 예약까지 했다. 하지만 세현이 잠 문제로, 당시 육아에 많이 지쳐있었나 보다. 여행을 얼마 앞두고 비행기를 취소했다. 그래도 어디로든 가고 싶어서 급하게 일주일 동안 일본에 다녀왔다.
아내 뱃속에 둘째 아들이 있을 때도 오키나와와 타이베이 여행을 다녀왔다. 첫째 아들이 18개월 무렵. 남겨진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한 인간이 태어나 가장 귀여운 모습을 한 시기가 바로 이때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적당히 통통하게 오른 살, 아장아장 걸음.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말 한마디. 사랑스럽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동생을 직접 본 이후로는 뭔가 달라졌지만) 우리 부부는 이 시기 큰 아들 사진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세현이 할머니는 너무 어릴 때부터 아이가 비행기를 타고 다니느라 키가 안 큰다고 걱정하신다. 당신 아들은 비행기를 안 타고서도 키가 이렇게나 작은데 말이다.
둘째 세온이는 형보다 더 어릴 때부터 해외에 다녔다. 세온이가 태어난 2017년, 마침 추석 연휴가 참 길었다. 아이가 너무 어렸지만, 그 기회를 놓친다면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을 거 같았다. 두 아이의 부모가 된 후 지친 일상에 활력소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결국, 태어난 지 5개월도 채 안 된 아이를 들쳐 안고 나갔다. 멀리 갈 수는 없었기에, 우린 다시 후쿠오카에 갔다. 돌이켜 보면 너무 어리긴 하다.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온이는 세현이보다 개월 수 대비해 키가 큰 걸 보면, 세현이의 작은 키가 비행기의 문제는 아닌 듯싶다. 두 아이 모두 어서 키가 더 컸으면 좋겠다.
네 가족의 첫 해외여행, 지친 아빠의 모습 (2017.9. 일본 후쿠오카) / 아기 띠 안에 얌전히(?) 있을 때가 좋았지 (2018.1. 일본 오키나와)
이후에도 가고시마나 시코쿠 지방, 마카오 등 여러 지역을 다녀왔다. 모든 기억이 소중하지만, 우리 가족의 많은 여행 중 유럽여행을 콕 집어 글로 쓰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유럽이 우리 부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기 때문이다.
2013년 4월. 결혼 후 신혼여행으로 프랑스와 스위스를 다녀왔다. 나는 대학생 시절 여름 친형과의 유럽여행 경험이 있었고, 아내는 대학 시절 겨울 이탈리아로 연수를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신혼여행은 무려 4월이었다. 완연한 봄의 중간, 아내와 경험한 파리와 스위스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토요일 11시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오후 4시 비행기로 파리로 향했다. 다음날 파리에 새벽 6시에 도착했지만, 시차 적응 따위 필요 없었다. 무엇보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공원에 앉아만 있어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공항에 늦게 도착해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80만 원을 더 들여야 했지만, 생각만 해도 좋은 추억이다. 신혼여행 일주일 동안 갈 수 있는 만큼 많은 도시를 다녀왔다.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해, 스위스 인터라켄, 베른을 거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파리로 와 인천으로 돌아오는 일정. 이 빡빡한 일정을 경험하고도, 더 많은 도시를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화사한 봄의 파리, 신혼여행 (2013.4. 프랑스 파리)
2014년 1월. 9개월 만에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이번엔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베니스)와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거쳐 파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겨울이니 주로 따뜻한 도시를 방문했다. 밀라노로 들어가 1박, 피렌체에서 1박, 베니스에서 1박. 거의 나흘 동안 시차 적응도 하지 못한 채 새벽 거리를 돌아다녔다. 피렌체의 골목, 미켈란젤로 언덕. 베니스의 광장. 특히 겨울 새벽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우리 부부는 신혼여행 때 더 많이 사진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워 삼각대를 활용해 많은 사진을 찍었다. 과정이 조금은 고생스러웠지만, 우리끼리 사진을 찍는 과정이 참 즐거웠다.
추운 새벽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 (2014.1. 이탈리아 피렌체) / 이른 새벽 산 마르코 광장에서 셀프 촬영 (2014.1. 이탈리아 베니스)
그리고 2014년 3월. 런던행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날은 내 생일날이었다. 내겐 잊지 못할 생일 선물이다.
2014년 2월 28일을 마지막으로 당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던 학교에서 나오게 됐다. 지속적인 학생 수 감소로 학교에 자리가 없어진 탓이다. 계약직 신분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시 근무할 학교 몇 군데를 지원했지만, 번번이 탈락하는 바람에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교사로 지내는 삶에 대한 회의도 있었다.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참 어려웠다. 학교 현실도 내 생각 같지 않았다. 아니, 그냥 내 마음이 변할 걸지도 모르겠다.
고민 끝에 아내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고. 그리고 9월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까지 유럽에 가 지내고 싶다고.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그동안 나 자신이 좋은 교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을 하나씩 발견하는 것이 힘들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 서러움도 있었고, 내 맘처럼 변하지 않는 학교에 대해 안타까움도 있었다. 모든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실적으로 이 상황에서 아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은 뻔하다. 힘내서 다시 일어서자고. 하지만 아내는 별다른 말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고 했다. 아내가 그리 승낙할지 몰랐기에 내가 더 놀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혼한 지 고작 10개월, 직장 없는 남편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아내를 존경한다. 나는 아내에게 평생의 빚을 졌다.
아내의 답변을 들은 당일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아내 직장이 서울 관악구 신림동 부근에 있었다. 아내 퇴근 시간에 맞춰 직장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커피를 마시며 아내의 답변을 기다리는 사이 서울의 모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 통화 중 고민 끝에 용기를 냈다. 학교에 갈 수 없겠다고 내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이후 나의 부모님께도, 장인 장모님께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직장을 포기하고, 여행이라니. 말씀드리고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혹자는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고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짧은 찰나에 그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답했던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 아내와의 유럽 살기 프로젝트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추억들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열흘 뒤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양가 부모님껜 대학원 진학을 위해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난다고 말씀드렸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기왕 가는 거 영어 공부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 영어 공부를 위한 책도 한 보따리 들고 갔다. 그러나 3개월 동안 영어 실력이 늘지 않았으니, 거짓말을 한 셈이다. 아, 사실 우리가 가는 곳도 영국이 아니라 독일이었으니 거짓말은 거짓말이었다. 좀 더 떳떳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전적으로 나와 아내가 결정할 문제였다. 덕분에 아내와 평생 간직할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다. 순간의 고민 속에서 용기를 냈던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우리가 튤립 축제를 구경하게 될 줄이야 (2014.4.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따스한 봄날, 독일의 수도를 찾아서 (2014.4. 독일 베를린)
우리는 런던에서 며칠 여행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야간 버스를 타고 독일 뮌스터로 향했다. 우연한 기회에 뮌스터에서 유학 중인 한국 학생이 사용하던 방을 임대해 두 달 정도 지낼 수 있었다. 이 기회가 아니었다면 평생 뮌스터를 가볼 일이 있었을까. 우린 평일엔 뮌스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주말엔 저가항공을 이용해 여행을 다녔다.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등 독일의 유명 도시들은 물론이고, 네덜란드, 스페인, 크로아티아 등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가보았다. 손흥민 선수의 경기를 보겠다고 아침부터 레버쿠젠 경기장에 방문해 티켓을 사고, 선수단 버스를 무작정 기다렸던 기억도 있다.
독일 생활 이후 벨기에와 파리, 로마, 베니스, 프라하 등 도시를 들러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잠시 잊고, 아침에 일어나 걷고, 식사하고,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잠을 자고, 그때의 매일의 평범한 일상 모든 순간이 내게 너무 소중하고 중요하다. 아내와 6년을 연애하고 결혼했지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돈을 아끼겠다고 매일같이 걸어 다니다 보니 신체적으로도 가장 건강했다. 여행을 다니며 들렀던 여러 도시에 우리 부부의 가장 즐겁고 따뜻한 추억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이들과 그 도시들을 다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너무나 특별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 도시들도 대부분 나와 아내가 함께 갔던 곳들로 정했다.
TV에서만 보던 그곳에서 꿈만 같은 시간 (2014.4.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글을 완성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책을 마무리하며 서문을 쓰는 지금이 2020년 5월이다. 여행 후 2년이란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 사이 아이들은 부쩍 자랐고, 우리는 2020년 1월, 두 번째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이후 코로나 19 사태가 심각해져, 다음 여행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행 전부터 글을 쓰기로 작정을 했다면, 혹은 애초에 여행 목적이 글쓰기였다면 조금 더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장애물이 나의 게으름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정말 책으로 완성하게 될 줄 생각도 못 했기에 한껏 게으름을 피웠다. 또 다른 차원의 고민도 있었다. 책을 내기 위해서 여행 사진을 실어야 하는데, 아이들 초상권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부모라고 아이들 사진을 맘대로 쓸 순 없지 않은가. 그동안 다른 작가들이 아이들 사진을 책에 활용할 때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었던 사람이다. 사실 지금까지도 이래서 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은 두려움에 스스로를 합리화하기로 했다. 이 기록을 마무리해야 두 번째 여행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여행에 대한 기억이 잊히기 전에 첫 여행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결국,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뤄왔던 작업. 이제야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글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나 자신이 대견하다. 당연히 내가 좋은 글을 써서가 아니다. 어차피 나는 글 쓰는 전문가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쓴 글은 아니니 말이다. 문장이 어색하고, 어휘가 이상하다고 흉볼 사람이 없다고 믿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여행도, 글쓰기도 결국 자기만족으로 끝나는 일 아니겠는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으면 삶에 감사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한 그 자체가 대견하고 감사하다.
글 중간중간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무수히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이미 알고 있는 문제를 솔직히 자백한다.
먼저 글 쓰는 기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여행의 생생한 현장감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특히 대체로 힘든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점차 미화되지 않는가. 여행하며 기록을 남긴다고 남겼지만, 여행 당시의 생생함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있다.
글을 처음 시작할 때 쓴 서문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거의 1년 반 전에 쓴 서문이다. 글을 마친 후 서문을 다시 읽으니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때문에 초기에 쓴 서문은 책의 맨 뒤에 남겨 놓았다. 그리고 이 서문을 다시 쓰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글의 시제가 뒤죽박죽이다. 현재형과 과거형이 무분별하게 쓰여 있다. 검토하며 통일해야 하나 고민하다가도, 그 과정에서 글쓰기를 포기하게 될 것만 같았다.
두 번째는 책이 온통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다는 점이다. 거의 사진으로 책의 면수를 늘렸다. 사실 남 가족사진에 뭐 그리 관심이 있겠는가. 사진을 좀 뺄까 싶다가도, 이 책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지 않았다. 이 책은 첫 번째 독자는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사진 없이는, 그 시간을 온전히 추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책의 제목을 짓는 일이 참 어려웠다. 학교에서 수업할 때 학생들에게 제목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한다. 화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반대로 독자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용이 제목 안에 담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도 글의 의도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글 내용을 한 문장으로 함축하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 문장으로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한다니.
고심 끝에 정한 제목이 “아들, 아빠도 여행이 가고 싶다”이다. 나는 창의성이 요구되는 요즘 시대에 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좀 더 세련되고 멋들어진 제목을 창작해 내기엔, 내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멋진 제목을 지어낼 요량이 없다면, 그저 솔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목에 담고 싶었다. 글 대부분은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며, 살아오며 느낀 감정들로 채워져 있다. 그렇기에 제목에 아들과 아빠라는 주인공을 설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아이들의 부모이지만, 정말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부모도 여행이 가고 싶기 때문이다. 부모 자신을 위한 여행을.
이제야 진짜 여행을 마무리하는 느낌이다. 두 번째 유럽여행도 다녀온 마당에 첫 번째 여행이 인제야 끝이라니. 글을 정리하며 지금도 여행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역사학의 유명한 고언인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E. H. Carr)”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기록을 남기다 보니 그때의 상황, 그때의 아내, 그때의 아이들과 대화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책에 담은 여행 사진들을 쭉 보니 아이들이 정말 많이 컸다고 느낀다. 그리고 아내와 두 아들에게 깊은 존경심과 감사를 느낀다. 돌이켜보면 두 아들이 세상에 나올 때 아내가 참 많이 힘들었다. 아이를 낳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나로선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출산의 과정을 아빠로서 지켜보니, 아이들도 엄마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도 비슷했다. 그간 내가 들인 노력보다 아내가 들인 노력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말도 배우기 전 울던 모습들을 떠올려 보면, 녀석들도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웠을까. 더욱이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행을 가려는 부모를 따라가 그 많은 고생을 해냈다.
글을 마무리하며, 이 글이 용기를 내고 그 힘든 과정을 이겨낸 아내와 아들들에게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기원한다. 이 글을 읽으며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질 수 있다면 좋겠다. 과거의 좋은 기억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혹여나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힘든 육아의 삶 속에 작은 위안과 용기를 얻는 계기가 되길,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