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확인
3. 사랑이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발음하는 순간 잊고 있던 순간이 겹쳐졌다. 처음으로 사랑한다 말하던 순간에도 이렇게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나를 걸었었다. 말라붙은 입술이, 죄어오는 목구멍이, 터질 것 같은 가슴이, 떨리는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삼 년 전 그 순간처럼 환하게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더더욱 찌푸려지고 있었다. 관계를 되돌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헛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 내가 잘할게.”
고백을 넘어서 매달리고 있었다.
“잘한다고? 뭘?”
“노력할게. 너한테 맞출게.”
자존심 같은 건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나한테 맞춘다고? 뭘? 어떻게?”
“네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뭘 원하는지, 네가 알아?”
그의 눈이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네가 날 알고는 있는 것 같아?”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적대감으로 으르렁거렸다.
“네가 날 이해하고는 있는 것 같냐고?”
“그래, 몰라, 난, 그러니까 난,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널 다 알겠어. 얘기해줘. 네가 얘기해주면 되잖아. 네가 얘기해주면 알 수 있잖아. 알면, 알면, 내가 맞출 수 있잖아.”
“하, 그런다고 네가 나한테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소리쳤다. 화가 난 맹수처럼 포효하고 있었다.
“나는, 너랑 있으면, 뇌가 죽어. 뇌가 멈춰버린다고.”
내가 아니라 그가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내뱉고 있었다.
“내가 간신히 만들어놓은 내가 무너지는 게 싫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주먹 쥔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겪고 싶지 않은 일을 피해서 가는 것뿐이라고.”
온몸으로 진저리치고 있었다.
“사랑해!”
나도 모르게 외쳤다. 비명에 가까운 한마디였다. 다시 제대로 전해야 했다.
“사랑해.”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사랑해.”
무언가 더해야 할 것 같았지만 무얼 더 해야 할지 몰랐다.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널 정말 사랑해.”
바보처럼 사랑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되뇌면 되뇔수록 사랑한다는 말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았다. 공허한 것 같았다. 거짓말 같았다.
“나는 이제 너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 널 봐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꼭 이렇게 적나라하게 끝내야겠냐?”
그는 이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어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과 함께 그 앞에서 울지 않겠노라는 다짐도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또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경멸이 어렸다. 눈물도 주체하지 못하는 구질구질함 때문이었는지, 말을 해줘야만 아는 어리석음 때문이었는지, 마음을 구걸하는 구차함 때문이었는지, 그 모든 것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그는 아주 가끔 그런 표정을 지었었다. 술에 취해서 무작정 시비를 걸던 술집의 누군가에게, 감사하게 될 거라며 무조건 교회에 끌고 가려던 길거리의 누군가에게, 대화가 통하지 않는 막무가내들에게 그런 표정으로 돌아섰었다. 그들을 ‘상대하기조차 싫은 부류’라고 부르곤 했었다. 내가 바로 그 ‘상대하기조차 싫은 부류’가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