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시간

10장. 본능적 회피

by 문성 Moon song Kim


6.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장을 훑었다. 책장 맨 아래 칸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회과 부도를 찾아내 세계지도가 나온 페이지를 펼친 다음 펜을 들고 무작정 익숙한 나라 이름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유명한 관광지나 상표 같이 익숙한 게 조금이라도 떠오르는 나라들까지 지워나가다 보니 마지막으로 남은 게 러시아였다. 낯선 지명 투성이 드넓은 땅덩이를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선.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기차로 러시아를 횡단하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에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도 없었다. 만약 아프리카가 남아 있었다면 그곳으로 떠나려 했을 것이었다. 우연이라는 핑계로 여행지에 대한 기대나 실망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우연한 선택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해보고 기회비용을 저울질해가며 선택하는 일 따위는 이제 진저리 쳐졌다.


다만 혼자가 되고 싶었다. 그도 다른 이들도 없는 곳으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게 사라진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름을 읽어봐도 어떤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는 상상조차 낯선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곳에 던져진다면, 나라고, 내 것이라고 매달리고 있던 것들을, 그에 대한 마음까지도, 놓아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도 내게 남아 있는 게 과연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머물다 떠나고 머물다 떠나길 반복하며 길 위에서 떠돌다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티끌 같은 일에도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나라는 인간을 차라리 티끌 같은 존재가 되어 나뒹굴게 만들고 싶었다.


책상 서랍에서 비상금 봉투와 통장을 꺼내 액수를 확인했다. 지갑 속에 있는 돈까지 탈탈 털어 합치면 얼추 300만 원에 가까웠다.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에 받은 세뱃돈부터 휴학하기 전 여름방학에 했던 아르바이트 비까지 지금껏 모아 온 전 재산이었다. 새삼 술값과 택시비로 날려버린 돈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돈으로 가능한 한 멀리 가능한 한 오래.


의자에 쌓여 있던 옷들을 이부자리 위로 던져두고 키보드 위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들도 책상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컴퓨터 본체에 쌓인 먼지를 대강 쓸고 전원 버튼을 누르며 의자에 앉았다. 인터넷을 켜고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쳤다. 검색 페이지에 나온 링크들을 닥치는 대로 클릭해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모니터만 빛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퍼뜩 정신을 차리자 밖에서 TV가 떠들고 있었다. “밥 다 차려놨는데 밥부터 먹고 보라니까.” 엄마가 아빠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족에게 이야기할 차례였다.


엄마 아빠 웬일로 언니까지 일찍 들어와 셋이서 사이좋게 저녁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나를 보고 얼굴이 굳은 아빠와 아빠 눈치를 살피는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를 살피는 언니를 지켜보며 밥을 몇 술 뜨다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나 한 학기 더 휴학했어요.”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복학 전에 여행 다녀올게요. 이번이 마지막이야. 돌아와서 복학하면 정말 열심히 할게.” 말문이 막힐까 봐 반찬을 내려다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엄마 아빠가 바라는 대로 취직 준비도,”


물벼락이 말을 막았다. 아빠가 물컵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 너, 네가 제정신이야?” 이마에서 턱으로 다시 바닥으로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 그렇게 제멋대로 사는데 가족이 왜 필요해? 그렇게 잘났는데 혼자 알아서 잘 살면 될 거 아니야?” 분에 못 이겨 고함쳤다.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아빠의 두 눈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너 나가! 나가면 그만이야!” 이제 질렸다는 얼굴로 손사래 쳤다. 엄마도 언니도 역시 질렸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면 다시는 기어들어올 생각하지 마! 다시는 나한테 손 벌릴 생각 하지도 마! 알았어?” 방으로 향하는 내 뒤통수에 대고 퍼부었다. 방문을 닫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저 싹수없는 거 도와줄 생각도 하지 마! 저건 내 새끼 아니야!” 아빠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소리치는 게 방안에서도 똑똑히 들렸지만 다시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화면에 뜬 링크들을 하나씩 클릭하는 데에만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다음날부터 가족 모두가 나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 화장실이나 부엌에서 정면으로 마주치는 걸 피하기만 하면 이전과 그리 달라진 것도 없었다. 결과적으론 바라던 대로 된 셈이었다.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이 여행 준비에만 매달릴 수 있었으니까.


첫 해외여행이라 준비해야 할 게 산더미였다. 매일같이 인터넷으로 알아낸 정보를 도서관과 서점에 가서 비교해보고 준비해야 할 목록을 업데이트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구청에 여행사에 대사관을 쫓아다니며 서류 절차를 챙기고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를 가장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는 틈틈이 여행 중에 필요한 물품들을 장만하러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보면 다른 무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루가 가버렸다.


여행을 위해 준비해야 할 목록이 줄어들수록 마음이 복잡해졌다. 억지에 가까운 여행 계획이 실현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질 않았다. 정말 가는 건가 중얼거리다가도 정말 가야 하나 고민하게 될까 봐 거기에서 그만 생각을 멈추고 재차 준비해야 할 목록을 확인하고 남아 있는 것들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쳐가며 더더욱 부지런을 떨었다. 초조해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보자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아슬아슬한 그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때때로 내 안에 있는 브레이크를 부수는 것 같은 짜릿함까지 맛보고 있었다.


떠나기 전날 밤이 되어서야 덜컥 겁이 났다. 밤늦게까지 짐을 싸고 누웠는데 잊어버린 게 있는 건 아닐까 짐을 풀었다가 다시 싸고 풀었다 다시 싸고 나니 시간이 벌써 새벽 3시를 넘기고 있었다. 앞으로 세 시간. 과연 계획대로 6시에 일어나 출발할 수 있을까부터 걱정스러웠다. 조금이라도 자두는 게 나을 것 같아 불을 끄고 누웠는데 이부자리 옆에 쌓아둔 커다란 배낭과 보조가방이 내 몸뚱이보다 커 보였다. 저 짐을 메고 몇 달은커녕 며칠은 버틸 수 있을까. 러시아에 도착하면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낼 수나 있을까. 러시아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조차 못하면서. 도대체 무얼 믿고 가는 걸까.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두 달 가까이 여행을 준비한 과정을 되짚어봤다. “멋지게 살아라.” 무심하던 그의 목소리도 손을 흔들던 후배들도 나를 훑어보던 교수의 얼굴도 떠올랐다. 마음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 여행을 원한 게 나였다. 설사 누구 하고도 제대로 말을 나눠보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어딘가를 헤매게 된다고 해도 그게 정말 대수일까. 이미 다 겪어본 일이었다. 그런 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내가 살아온 곳이 아니라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창밖에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고 있었다.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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