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음미
6. 조용한 출발이었다.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이나 신호음도 없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가 테이블에 앉아 플랫폼을 내다보며 기다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기차가 출발하는지도 몰랐을 뻔했다. 미끄러지듯 이르쿠츠크 역을 빠져나와 서서히 속도를 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보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점점 빠르게 지나쳐가는 곳곳이 눈부시게 빛났다. 넋을 잃고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있는데 테이블 맞은편에 누군가 앉았다. 옆자리 침대에서 짐을 풀던 아주머니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먼저 살짝 눈인사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마주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를 벗어나고 울창한 숲도 지나고 나자 들판이 펼쳐졌다. 지평선이 가물가물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기차 안으로 언뜻언뜻 수풀 그림자가 달려들었다가 사라졌다. 아주 조금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신선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적당히 서늘하고 적당히 따사로운 날씨였다.
기차가 커브를 돌거나 속도를 높일 때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창밖의 풍경을 덮어버릴 만큼 커졌다가도 이내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덜컹 덜커덩 덜컹 덜커덩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꼭 달리는 기차의 심장박동 소리 같았다. 이제는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당연하게 여겨졌다. 이따금 섞여 드는 억센 발음의 러시아어까지도.
불과 몇 시간 전 기차에 오르던 순간이 까마득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항상 기차와 하나가 되어 달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달릴 수만 있다면 끝없이 여행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 편안했던 적이 없었다. 이르쿠츠크도 상트도 모스크바도 무언지 모를 불편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나온 모든 곳이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언제나 떠나야 할 곳이었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달리는 순간을 위해서 여행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어딘가에서 머무르다가 떠나는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서 놓여나는 순간, 또 다른 것들 속으로 달려가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연녹색 들판이 넘실거렸다. 노랑, 빨강, 파랑, 다채로운 들꽃들이 미처 다 알아보기도 전에 녹색 물결 속에 점점이 박혀 스쳐갔다. 눈을 들면 파랗디 파란 하늘. 들판에 비하면 보잘것 없이 작은 구름 한 조각이 지평선 근처에 멈춘 듯 떠 있었다. 한 여름의 시베리아가 무심하게 펼쳐져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누구도 닿지 못하고 스치듯 지나칠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지나쳤고 이번에도 그렇게 지나치고 있을 뿐인데 이유 없이 가슴이 저며 들었다.
지평선이 금빛으로 잦아들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이 하늘도 대지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빛은 부드럽게 번지듯 퍼져나갔다.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가 넘어가는 해를 따라 시시각각 빛깔을 달리하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이 순간 이 자리를 지나고 나면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스쳐 지나고 마는 게 안타까워 급기야 울고 싶어 졌다.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들 짐을 정리하고 침대 매무새를 고치는 등 저녁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창문을 조금 더 연다고 뭐라고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창문을 한 뼘 정도 더 들어 올리고 열린 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바람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스쳐갔다. 손을 뻗으면 잡힐 듯 가까운 덤불들도 빠르게 스쳐갔다. 멀리서 물결치는 수풀들도 이제는 아주 가는 금빛 띠처럼 보이는 지평선도 스쳐 지나갔다. 기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바람이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할 정도로 달려들어 눈을 감아버렸다. 옆에 있는 사람들의 인기척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몰아쳐 나를 감쌌다. 내가 사라지고 있었다. 모든 게 하나가 되고 있었다. 오로지 달리고 있는 이 순간만 있을 뿐이었다.
다시 창문을 원래대로 내리고 머리를 기댔다. 햇살이 잦아든 자리에 어둠이 내려앉는 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어둠에 잠긴 들판 끄트머리 마지막 햇살을 받은 들꽃과 덤불과 작은 나무들이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순간도 놓칠 새라 눈을 크게 떴다. 스쳐가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음미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떠나보내고 그것들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침대 구석에 던져 놓은 가방을 끌어당겨 카메라를 찾았다. 여행 내내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터라 처음 짐을 꾸릴 때 넣어둔 그대로 앞주머니 구석자리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 카메라를 꺼내 전원을 켜고 열린 창틈으로 내밀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질 때까지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날이 완전히 저물어 창문을 닫고 돌아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아까 마주 앉아 창밖을 보던 그 아주머니였다. 러시아어로 묻자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보고는 다시 한번 영어로 물었다. 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찍느냐며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디스 이즈 스페셜 투 미.”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녀와 눈을 맞추고 웃어 보였다.
자연스레 대화가 시작됐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까지 가는지 왜 기차를 탔는지 이어지는 질문에도 경계심이 들기는커녕 그녀가 궁금해지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까지 더듬더듬 대답하고 이름을 묻자 그녀도 물어봐주길 바랐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아나스타샤.” 그녀가 말해준 이름을 따라 되뇌는 순간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칭찬받은 어린아이처럼 으쓱했다. 복도에 불이 꺼지고 침대에 누웠는데 “굿 나잇”하고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테이블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도 건너편에 그녀가 누워 있었다. 덜컹거리는 침대가 포근했다.
대화는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그녀도 나도 영어가 유창하진 않았지만 간단한 단어 몇 개만으로도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나와 이야기할 때면 어린아이에게 하듯 눈을 맞추고 또박또박 발음을 해주었다. 빵 한 덩어리에 차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우는 날 보고는 기차가 설 때마다 나를 데리고 나가 현지인들이 식사로 먹는 빵이며 과일 같은 것들을 가르쳐주고 내가 먹을 만한 것들을 골라주었다.
옆에서 우리를 힐끔거리던 사람들이 마침내 말을 걸었을 때에는 그들에게 러시아어로 나를 소개해주고 그들이 물어보는 걸 일일이 영어로 전해주었다. 정말로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를 통해서 걸음마하듯 한발 한발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누구든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주었다. 점심때가 되자 햄이니 샐러드니 각자 가지고 있던 음식을 꺼내서 테이블에 모이더니 나를 불렀다. 어디선가 보드카가 나타나고 사람들 손을 돌고 돌다가 내게 왔다. 기대에 찬 표정들을 져버리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잔을 입에 털어 넣는 동시에 환호성이 터지고 결국은 술이 바닥나고서야 자리가 끝났다. 그러고도 가방을 뒤져 가지고 있던 과일을 나눠주거나 오랫동안 품고 다니며 아껴먹었음직한 사탕이나 과자 같은 것을 내밀며 활짝 웃는 얼굴들 앞에서 고작 “쓰빠씨바”라는 말 한마디밖에 할 줄 모르는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여전히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하늘 그리고 대지뿐. 이틀이 지나면 대지가 끝나고 바다가 나온다는 걸 알면서도 달리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저 대지가 끝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저 거대한 대지가 스쳐가는 풍경만이 아니라 달리고 있는 기차도 기차 속에 앉아 있는 나도 내 주변에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까지도 보듬고 있는 것 같았다. 보잘것없는 우리를 품고 무심한 듯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