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쿠츠크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작은 도심에 할만 한 일은 금세 바닥이 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도 지쳐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광장에 선 레닌을 보고 지금껏 러시아를 여행하는 내내 한 번도 레닌을 그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매번 그리지 못하고 지나친 그의 모습을 그릴 때였다. 먼 곳을 바라다 보는 그를 올려다보며 손을 움직였다.
러시아에 무지한 여행객이었던 나에게도 레닌은 러시아의 상징이었다. 레닌의 동상은 러시아 어디에나 있었다. 이르쿠츠크만이 아니라 어느 도시에서든 도심의 광장이나 공원에 가면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대개 힘차게 팔을 뻗고 굳건히 선 모습이었다. 높은 대에 올라 이제 막 연설을 하려는 듯 혹은 이제 막 연설을 끝낸 듯 선 그의 모습은 지나치는 사람 한 명 없는 텅 빈 광장에서조차 카리스마가 넘쳤다. 강인한 이마와 깊은 눈매 아래로 굳게 다문 입을 보며 그가 얼마나 사람들을 압도하는 지도자였는지 혹은 얼마나 사람들이 지지하는 지도자였는지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며 내가 여행했던 2003년에도 여전히 어디에나 있던 그의 동상의 존재에 그때에도 여전히 그가 얼마나 사람들을 압도하는 혹은 얼마나 사람들이 지지하는 지도자였는지 짐작해본다.
농노들을 무료변론한 변호사,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제국주의와 자국을 옹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넘기 위해 코민테른을 결성하고 나아가 식민지의 독립을 지원한 소비엔트 연방의 수반. 암살시도로 인한 총상, 정치적 숙청으로 인한 독살설이 따른 죽음. 맹목적 믿음을 버렸던 무신론자였지만 우상화된 사후. 그는 스탈린으로 시작된 권력투쟁과 독재를 하늘에서 지켜봤을까. 그가 독립을 지원했던 식민지배를 당하던 약소국민들이 강제이주로 여기 이르쿠츠크까지 흘러들어오게 되는 걸 보며 뭐라 했을까. 지금의 러시아를, 세계를, 1%와 99%로 나뉜 사람들을 보며 그는, 뭐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