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올랐다. 3박 4일이 넘는 시간을 달리게 될 것이었다. 횡단의 종착점이자 여행의 종착점 블라디보스톡까지. 몽골이나 중국으로 향하는 루트를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루트로 정한 것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끝까지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택한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길 하나를 고르는 일에도 나는 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소한 일이었지만.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우리는 의미 없이 태어나 의미 없이 살아가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미를 찾고 만들고 부여하며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때로는 그 의미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지도 모른다.
열차는 꼭 다시 돌아온 집처럼 편안하고 아늑했다. 쿠페 칸은 여전히 단출하면서도 있어야 할 것들은 모두 갖춰져 있었다. 이미 오래전 한쪽 끈이 떨어져 버린 40kg 백팩과 돈과 여권을 넣고 다니던 크로스백까지 풀고 나자 더 이상 필요한 게 없었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천천히 밀려나던 울창한 나무들이 사라지고 덜커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지가 펼쳐졌다. 아득한 지평선과 하늘 그리고 넘실대는 초원이 한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멀어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쳐지나는 모든 게 사랑스러웠다. 달리고 있는 그 순간 내 가슴이 뛰고 있다는 것을,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쿠페 칸의 나머지 세 자리를 채운 러시아인들과 어색한 침묵도 잠시뿐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서투른 영어와 서투른 러시아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마도 창밖의 풍경에 연신 감탄을 하며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던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먼저 말을 걸진 않았지만 나를 지켜보며 나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렸다. 내가 말을 걸자 나보다 더 서투른 영어에도 열과 성을 다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이칼의 명물 오물 훈제를 맛보는 행운을 누린 것도 그들이 날 챙겨준 덕분이었다. 갑자기 지갑을 챙기라는 몸짓에 영문도 모르고 지갑을 들고는 그들을 따라나섰다. 기차가 어느 역에 정차하자마자 우리는 달려나가 현지인들이 파는 오물 훈제를 한 마리씩 사고는 바이칼호에 손까지 담갔다가 다시 헐레벌떡 기차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칼같이 출발하는 열차에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꾸페칸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포일을 열고 오물의 살을 발라먹으며 기가 막힌 그 맛을 음미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꺼내놓았다. 빵과 과일 그리고 보드카를 서로에게 돌렸다. 누군가는 러시아의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자신이 지었다는 시를 읊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수줍어하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무뚝뚝하게 침묵하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환한 웃었다. 그들은 여행에서 만난 이들 중 가장 언어로 의사소통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에서 만난 이들 중 가장 의사소통이 잘 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사전으로 그림으로 몸짓으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를 이해했고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러시아인들 속에 깊숙이 들어가 일상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에도 열차는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