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켓들을 보며 여정의 마지막 흔적들을 더듬는다. 블라디보스톡행 열차티켓과 침대칸 시트 영수증에 열차가 블라디보스톡 역에 도착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열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 모두 열차가 채 멈추기도 전에 침대와 복도를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를 동생처럼 챙겨주던 옆자리 올랴는 여행 중에는 한번도 하지 않았던 화장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열차가 멈춰서고 이미 오래전에 한쪽 끈이 떨어진 배낭을 추켜올려가며 플랫폼에 내렸을 때 내 곁에 서있던 올랴가 달려갔다. 저 멀리 멋들어진 해군복을 차려입고 마중을 나온 그녀의 남편에게 안겼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들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역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키스를 하고 얼굴을 부여잡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희 웃던 올랴와 그녀의 남편에게 손을 흔들며 떠났다.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그곳을.
자루비노에서 속초로 가는 선박티켓에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순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한시라도 빨리 이 티켓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톡을 떠나려했다. 시작은 방을 빌려주기로 했던 유학생이 연락이 되질 않아 한국인민박을 찾아간 것이었다. 간신히 도착한 민박집 주인은 모스크바에서 만난 민박집 주인과 꼭 닮아 있었다. 한국인이 그것도 여자 혼자 어린 나이에 여행온 게 대견하다며 나를 반가워하는 듯 하다가 자신이 어떻게 돈을 벌고 다른 한국인들은 어떻게 돈을 버는지 무엇이 돈이 되고 무엇이 돈이 되지 않는지 끊임없이 돈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이 모는 고급차를 타고 암시장과 북한식당에 데려다주는 호의를 베풀고 싶어했고 당연히 내가 그걸 감사히 받아드릴 거라 여기고 있었다.
거절을 하려다가 따라나선 건 그가 데리고 있던 두 명의 어린 러시아 여직원들이 풍기는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얽히는 시선과 무언지 모를 끈적한 제스쳐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실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은밀한 관찰따위는 필요없었다. 민박집 주인은 그들이 한국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반말과 욕지거리로 그들을 부르고 조롱했다. 여직원들도 그게 욕인줄도 모르고 이년 저년 같은 말들을 듣고 또 내뱉었고 그걸 보며 또 다시 민박집 사장은 우습다며 낄낄댔다. 그들은 중국인들의 억센 외침과 모피들로 둘러싸인 암시장 한복판에서도 개의 골과 내장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개고기가 넘치는 북한식당 한 복판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거리하고 있었다. 나는 영락없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낯설고 기괴한 풍경 속에서 그보다 더 낯설고 기괴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며 그들에게 말뜻을 알려줘야하는지 아니면 민박집 주인을 제지해야하는지 혼자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고는 민박집으로 돌아와 사장과 러시아 여직원이 같이 침실로 향하는 걸 보고 그녀가 사실은 현지처였음을 알았다. 밤새도록 물건을 집어던지고 악을 쓰는 그녀와 그녀에게 시달리며 달래보려 애를 쓰는 민박집 주인의 소리는 얇은 벽을 타고 울리며 나 역시 밤새도록 시달리게 만들었다. 그제야 그들 사이를 걱정하기보다는 내 숙면을 걱정해야할 처지임을 깨닫고 그곳에서 지내느니 차라리 가장 빠른 선박티켓을 끊은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버스를 타고 대여섯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자루비노항의 허허벌판. 덩그러니 놓여있던 허름한 컨테이너 박스에서 이뤄진 출국심사. 이고지는 걸로도 모자라 몇 자루씩 끌며 심사를 받던 보따리 상인들. 러시아산 버섯과 녹용밖에는 없다고 양이 많으니 나눠서 같이 들고 출국심사를 받자며 끈질기게 따라붙던 번들거리던 얼굴의 남자.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 자기도 한국교회에서 초대를 받았다며 한국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던 몽골인 아가씨. 자꾸만 여정을 캐묻더니 내가 시베리아횡단여행을 했음을 듣고는 그게 뭐 별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들 몇 번씩 러시아랑 중국을 오간 사람들인데 말이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하고 돌아서서는 자기들 중에 누가 가장 싸게 물건을 떼어 왔는가 열을 올리던 단체 여행객 아저씨들. 그리고 나까지 모두가 3등선실 승객들.
축구장 몇개 크기를 넘는 거대한 선박에 올라 복잡한 미로와도 같은 선실을 돌고 돌아 가장 밑바닥 가장 허름한 자리에 앉고서도 끝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서도, 서울로 돌아와서도 한참동안 나는 여전히 낯설고 기괴한 이상한 나라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을 새삼스레 쳐다보는 앨리스가 되어 지켜보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톡만이 아니라 서울을, 한국을, 사람들을, 그리고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