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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Aug 08. 2021

나의 오래된 데스크톱

1. 나는 지금 올해 생일을 맞아 새로 산 노트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책상 위에 올려둔 노트북 뒤에는 TV로도 쓸 수 있는 모니터가 한대 있다. 그리고 이 모니터와 연결된 선을 따라가면 닿는 곳에, 나의 오래된 데스크톱이 자리하고 있다. 그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책상 아래 구석진 곳에. 새카만 케이스. 본체 전면부에만 6개나 나 있는 USB 포트. 언제부터인지 작동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된 CD-ROM. 소리만 크지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 팬. 처음엔 한 쌍이었던 모니터와 스피커부터 키보드와 마우스까지 모든 것들이 떠나갔지만 여전히 잘 동작하는, 내 낡고 오래된 데스크톱.



2. 11년 전의 어느 초여름. 군대에서 이제 막 전역했던 나는 전역을 앞두고 자취방을 얻었다. 입대 전에는 기숙사에 살았으니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 방에 무엇을 가장 먼저 들여야 할까.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기본적인 물건들을 제외하고, 내가 가장 먼저 고른 것은 컴퓨터였다.

 우리 집에 컴퓨터가 처음 생긴 것은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당시 최신 모델이었던 386 컴퓨터를 사 주셨는데, 함께 왔던 거대한 프린터까지 생각하면 뭔가 웅장한 느낌마저 주는 녀석이었다. 당시에 그런 신형 컴퓨터가 있는 집은 주위 친구들을 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친구들은 컴퓨터를 해 보고 싶다며 우리 집으로 놀러 오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접한 녀석들은 대부분 컴퓨터와 관련된 전공을 가거나, 전공이 아니어도 컴퓨터 조립 정도는 뚝딱 해내는 어른으로 자라던데. 아쉽게도 내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써왔지만 내게 컴퓨터는 게임기였고 숙제를 하는 도구였다. 가끔 컴퓨터가 고장 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컴퓨터에 대해 잘 아는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3. 컴퓨터를 사기 위해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컴퓨터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친구였다. 나는 그에게 "백만 원 한도 내에서 가장 좋게 맞춰 줘!"라고 요청했고, 그는 맛있는 술을 한턱 쏜다면 생각해 보겠노라 답했다. 합의는 금방 이루어졌다. 자취방을 얻은 첫 주말. 나는 그간 모았던 군대 월급을 들고 그와 함께 용산 전자상가로 향했다.

 내겐 공포였던 용산 전자상가를 그는 무척이나 편하게 돌아다녔다. 무엇을 알아보러 왔냐는 말에 필요한 부품명을 이야기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가격이 아니면 단호하게 돌아섰다. 뉴스에서나 보던 무서운 형님들과도 몇 차례나 마주쳤지만, 친구의 단호함 앞에는 그들도 별 방도가 없어 보였다. 자기만 알고 있다는, 가격은 저렴하지만 소리가 정말 좋은 스피커를 마지막으로 풀 세트를 구매하는데 걸린 시간은 3시간 남짓이었다. 부품을 사는데 든 가격은 구십 하고도 몇만 원이었다. 쇼핑을 마친 그는 씩 웃으며 "너 혼자 왔으면 이 가격에 절대 이렇게 못 샀을걸?"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의 말은 틀린 말이었지만 굳이 이야기하진 않았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내가 혼자 이곳에 올 일은 애초에 없었을 테니까.

 부품들을 구매한 뒤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부품들이 너무 무거워서 자취방까지 택시를 타고 갔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돈 있으면 아껴서 이따가 술 마실 때 보태라는 친구의 말에 지하철을 탔던 것 같기도 하다. 그가 뭐라 뭐라 설명하며 컴퓨터를 조립해 주었지만 내 귀에는 도통 들어오지 않았다. 조립을 마치고, 컴퓨터를 켜고, 노래 한곡을 틀어 스피커까지 잘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낮술을 마셨던 것 같다. 그날 내가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긴 했던가. 아니면 술에 취해 그대로 잠들었던가.


 

4. 이 컴퓨터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TV가 없는 자리를 메꾸는 것이었다. 혼자 사는 것은 생각보다 외롭고 쓸쓸한 일이어서 집에 있는 시간에는 가급적 컴퓨터를 켜고 뭐라도 나오게 틀어두곤 했다. 컴퓨터에서는 무한도전이, 드라마가, 때로는 영화가 나왔다. 뭔가 볼 시간이나 정신이 없을 때면 노래라도 틀어두었다. 아예 노래만 틀거나 무한도전 가요제 부분만을 편집해둔 영상을 틀기도 했고 우리 동네 음악대장이 복면가왕에서 불렀던 노래들을 모아둔 영상을 틀어놓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 소리가 나면 집에 혼자 있는 느낌이 조금 덜했다.

 그다음으로 많이 한 것은 게임이었다. 이제 막 맞춘 컴퓨터인 만큼 새로 나온 고사양의 게임도 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는 혼자 조용히 몰입해서 할 수 있는 고전 게임들이 좋았다. 애초에 순간적인 컨트롤이나 상대와의 경쟁이 필요한 온라인 게임 같은 것은 잘하지도 못하기도 했다. 외출했던 엄마가 돌아오기 전에, 가족 모두가 잠든 새벽에 슬그머니 일어나 몰래 하던 게임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 편히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었다.

 가끔은 글을 쓰기도 했다. 제대로 마무리 짓는 것은 없었고 무언가 입력하는 것보다 하얀 화면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멍하니 있는 시간이 더 길긴 했지만, 작업실에 와 있는 작가가 된 듯한 착각 속에 키보드와 씨름하며 머리를 쥐어뜯던 날도 있기는 했다.



5. 컴퓨터를 산지 6~7년쯤 되던 어느 날. 컴퓨터가 갑자기 켜지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켜지다가 멈춰버렸다. 전원 버튼엔 여전히 빨간 불빛이 들어오고 있고 팬 돌아가는 소리도 분명히 나고 있지만, 윈도우 로고가 뜨기 직전에 모니터가 블랙아웃 되어 버렸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입력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리셋 버튼을 눌러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몇 차례 반복하다 보면 운 좋게 한번 정상적으로 부팅되는 순간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한번 컴퓨터를 쓰다가 끄고 다음에 다시 켜면 또다시 먹통이 되었다. 잦은 강제 종료와 재부팅 때문에 컴퓨터가 더 상해 가는 것 같았다. 결국 친구에게 SOS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컴퓨터를 맞춰 준 친구는 그 무렵 외국에 워킹 홀리데이를 나가 있던 터라 이번 도움은 다른 친구에게 요청해야 했다. 내 방에 와서 컴퓨터의 상태를 본 친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이 마치 보호자에게 도저히 가망이 없는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려는 의사의 표정 같아서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내게 "청소 좀 해."라고 말했다.

"청소? 나 청소 잘하는데?"

"보이는 데만 하지 말고. 컴퓨터 청소도 좀 하라고."

 그는 컴퓨터의 본체를 열어 내게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이 밀폐된 본체에 안에도 먼지가 이렇게나 쌓이는구나. 친구는 본체 안에 먼지가 너무 많이 쌓여 부품들이 열을 받고 상해서 컴퓨터가 켜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먼지가 가득 쌓인 본체를 원룸의 옥상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그리고 챙겨 온 휴대용 에어 컴프레셔로 먼지를 다 털어내었다. 본체 안에 있던 먼지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정말 이것만으로 컴퓨터가 다시 켜진다고? 믿을 수 없었지만 컴퓨터는 문제없이 다시 작동했다.

 단단한 껍데기에 쌓여 있어 몰랐는데 이렇게 내적 케어도 필요한 녀석이었구나. 그 후로는 가끔, 컴퓨터가 켜지지 않으면 한 번씩 본체를 열어 내적 케어를 해주었다. 그러면 컴퓨터는 언제 먹통이었냐는 듯 다시 잘 작동했다.

 


6. 얼마 전에 새로운 게임이 하고 싶어 져 설치했던 적이 있다. 온라인 게임인지라 그렇게 높은 사양을 요구하는 게임도 아니었고 그래픽으로 유명한 게임도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없이 돌아갈 줄 알았는데 컴퓨터는 도저히 그 게임을 구동시키지 못했다. 그래픽 옵션을 최소사양으로 맞춰도 부족해서 캐릭터들은 다 뭉개져 보였고 본체 안에선 불이라도 났는지 팬이 미친 듯이 돌아가며 소음을 냈다. 처음 맞출 때만 해도 최고 스펙의 컴퓨터였는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하고 싶은 게임을 할 수도 없을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런 문제는 컴퓨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2년에 한 번씩 바꿔왔던 핸드폰. 그 핸드폰으로 하는 모바일 게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바일 게임은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업데이트를 하는데, 지난달에 있었던 대규모 업데이트를 한 이후 게임 실행 속도가 무척이나 느려졌다. 단순히 느려졌을 뿐 아니라 게임을 하다 보면 핸드폰이 무서운 속도로 뜨거워지기도 했다.

 뜨겁고, 느리고, 답답하고, 버벅거리고, 시끄럽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컴퓨터와 핸드폰을 보며 마음이 좋지 못했다. 언젠간 내 몸도, 내 마음도 저렇게 될 것만 같아서였다. 새로운 문물을,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겨워하겠지.



7. 얼마 전에는 컴퓨터가 또 켜지지 않았다. 청소를 꼼꼼히 했는데도 켜지지 않아 1주일 정도는 아예 전원을 뽑아놓았다. 1주일 후에 다시 한번 청소를 하고 컴퓨터를 켜 보니 그제야 제대로 동작했다. 어쨌든 다시 켜지긴 했지만 그동안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처음 컴퓨터를 맞춰줬던 친구와 컴퓨터가 고장 났을 때 와서 고쳐주었던 친구에게 컴퓨터의 증상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그걸 아직도 쓰고 있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요즘 컴퓨터로 하는 거야 인터넷이나 문서작업 정도라서 큰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친구들의 말을 들으니 이제 정말 떠나보낼 때가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컴퓨터에 대해서는 잘 몰라 그냥 대기업에서 나온 노트북을 사기로 했다. 이제 친구를 불러 부품을 사러 가거나 조립을 해달라고 하는 것도 못할 부탁인 것 같았고 무엇보다 귀찮기도 했다. 그냥 사면되니까. 군대에서 받은 월급을 한 푼 두 푼 모아 겨우 장만했던 컴퓨터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지만, 이렇게 산 컴퓨터도 충분히 좋고 사용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8. 시간이 지나면 이 컴퓨터에도 많은 애정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과도 이런 에피소드들이 생길까. 이런 에피소드가 생길 때까지 쓰기나 할까.



9. 이 녀석과 관련된 추억을 이렇게 글로 옮겨 백업해 두었으니, 조만간에는 파일로 남아 있는 추억들을 백업할 예정이다. 그 백업까지 다 끝나면, 포맷을 하겠지. 그러면 나의 낡은 데스크톱은 마침내 텅 비게 될 것이다.



10. 나는 오늘, 나의 오랜 친구를 떠나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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