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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폐관수련인 Jan 31. 2024

덜 자란 동물

모질이 본인

독일에 온 지 햇수로 5년이 되었다. 초행길에 길 못 찾아 어리바리 타던 사람은 어디 가고 이제는 매일 같이 베를린 풍경을 감상하며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해도 매번 가는 길만 가서 그렇지 안 가본 길을 가면 여전히 길을 헤맨다.


아무렴 길 못 찾으면 어떤가,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나가서 길을 찾으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나갔다가 1시간을 미리 나가야만 하는 내 공간지각력에 감탄한다. 집에 혼자 살면서 혼잣말이 늘었는데 가끔 일이 잘 안 풀리면 비속어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게 되었다. 돌아도 돌아도 자꾸 똑같은 장소가 나오게 되니 이 반복되는 상황이 실외 러닝머신 타는 느낌 같이 느껴져 더 화가 난다. 근데 살은 안 빠지는 거지?


혼잣말 빈도가 잦은 것은 사실 자취 때문이라기보다는 대학원이 더 큰 이유 같다. 가끔 연구실 장비에 대고도 혼잣말을 하는데, 졸려서 말이라도 자꾸 하려는 게 원인인지, 아니면 그냥 안 풀리는 연구가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박사 발표가 코 앞으로 다가온다. 이제 드디어 내 꿈을 이루는 순간이 다가오는데, 그만큼 더 준비하고 정신 차리고 싶은 마음에 한국에 있는 전공책을 택배로 보내달라고 요청드렸다. 부족한 독일어를 발전시킬 책은 덤으로, 부모님이 뭐 더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보셔서 흘러가는 말로 약을 넣어달라고 말했던 것이 이렇게 문제가 될지 몰랐었다.


약은 여기 Apotheke에서 다 구할 수 있는 것들인데, 가격과 약효가 너무 불친절해서 그냥 간단히 타이레놀을 말씀드렸다.

근데 사실 약은 그냥 구실이고, 부모님이 책만 보내기 그래서 음식을 넣어드린 다는 것을 급구 말리고 대신한 물품이다. 지금껏 해외 소포를 받아본 적이 없다 보니 가족들도 나도 처음이라 주소 쓰는 법, 물건 내용 작성하는 법, EMS 제도 모든 게 새로워서 조금 즐거웠다.


그런데, 여기 통관에 걸렸고 한국의 우체국 직원이 말한 5일 도착과는 달리 보름이 지나서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찾으러 간 당일,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지하철 파업 때문에 3km를 냅다 걸어가게 되었는데, 또 초행길이랍시고 이상한 식료품 공장에 들어가질 않나 길을 못 찾고 땀 뻘뻘 흘리며 5km를 돌아다녔다.


'참 공부 하기 빡세네' 라는 말을 10보에 한 번씩 내뱉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이 보내준 물건 찾으러 가는 길인데 기분 좋았었다. 통관 검사는 당사자가 소포를 직접 열고 검사관이 같이 확인한다. 타이레놀뿐만 아니라, 비닐봉지에 탈지면, 마데카솔, 화상연고, 항생제 등이 하나 하나 뜯어서 빽빽이 견고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약이 손상받을까 봐 솜을 풀어서 함께 넣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통관 검사인이 이 멀쩡한 약들을 버려야만 한단다. 아니 내가 찾아본 거랑은 다른데, 책도 오염되었다면서 왜 책만 챙길 수 있다고 하는 거지? 다시 또 먼 이국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 상기된다. 이곳에 5년을 살아도 뭣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다. 그럼 왜 여기서 한국으로 보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건가. 보내기만 했지 받아본 것이 처음인데, 그렇다고 나 말고 다른 이들의 인터넷 속 경험담들은 여전히 믿을 거리가 못 되고, 남의 말을 마냥 신뢰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을 파기하기로 결정하고, 책을 챙겨 다시 출근길에 나섰다. 우연스럽게도, 파업이 그 시간에 끝나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되었다. 통관을 나와 터벅터벅 길을 나설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하철 창문에 비춰진 내 모습에 감정이 벅차 오른다. 3만 원을 공중 분해 시킨 것보다 자기 아들 보내주려고 하나하나 꾹꾹 눌러 담은 부모님의 정성버리게 만들었다는 게 마음 아팠다. 내가 약을 보내달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일어났을 것이다.


여전히 정신줄 놓고 사는 사람 같다. 뭐든지 잘하고 싶기는 무슨 뚫린 입이라고 입 밖으로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는 것 같다. 어지간히 모질이 같아야지... 뭘 잘했다고 눈물 글썽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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