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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이작가 Aug 02. 2020

차이나타운 노보텔의 제니

호주는 주인이 없는 땅이 아니라 원주민이 있었다.   

18세기 유럽 사람들에게 호주는 타라 눌리우스(Terra Nullius)라고 불렸고, 그 뜻은 '주인이 없는 땅'이다. 사실 1770년 캡틴 쿡(Captain Cook)이 호주의 시드니와 동부를 발견하기 전에 인도네시아에 동인도회사를 거느리고 있던 네덜란드의 타즈만(Tasman)이란 탐험가에 의해 호주 대륙의 존재는 이미 유럽에 알려져 있었다.  


타즈만은 인도네시아와 가까운 북쪽의 파푸아 뉴기니, 다윈 그리고 남으로는 태즈마니아 섬과 뉴질랜드도 발견하였으나, 향신료와 금이 없었기에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주인 없는 땅으로 남겨 두었던 것이다. 그후 1770년 캡틴 쿡이 동부 해안을 탐사하고 영국의 식민지로 선포하였고, 1788년 1대 총독 아서 필립(Arthur  Phillip)이 11척의 배로 죄수 700여 명과 군인 등 1000여 명을 이주시켜 록스(Rocks)에 도착한 1월 26일을 호주의 날(Australian Day)로 호주 백인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침략자인 백인 중심으로 쓰인 역사이다. 이미 애보리진(Aborigin)이란 원주민이 4만여 년 전부터 이 땅에 살고 있었다. 호주 대륙은 신대륙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대륙 중의 하나이고, 동남아시아 등지에 살던 사람들이 남으로 이주하여 호주 북쪽 지역부터 살기 시작하여 태즈메이니아 섬까지 총인구가 백만 명 정도였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땅 위에는 과일과 동물, 바다에는 물고기가 풍부했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 자연에서 얻고 이동하는 생활을 했다. 그러니 당연히 사유재산 같은 개념도 없었고 도시가 만들어지지 않고 300여 개의 부족이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유목 생활을 하며 평화스럽게 살았던 것이다.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았다. 노을 비친 붉은 땅에 빙 둘러앉아 어린아이들에게 조상들이 전해 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그들의 축복으로 영원히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원주민 시인, 오저로 누누 칼의 시집 중 우리는 간다(We are going) 


1788년 백인들이 오기 시작하니 외부인과 접촉 없이 살던 원주민들은 천연두, 홍역, 수두 같은 바이러스에 가염되어 절반 정도가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은 전쟁(Black War), 시드니 전쟁(Sydney War)이라 불리는, 주인이 없는 땅이니 원주민을 몰아내고, 또 인간이 아니라 동물 취급을 받았기에 학살이 시작이 되었다. 나중엔 학살보다는 노예처럼 부리는 것이 합리적이란 계산에 목숨을 유지할수 있게 되었지만, 곧 술, 담배, 아편으로 원주민의 삶이 더욱 피폐해지게 되었다. 


1900년부터는 원주민의 자녀들은 "개화"라는 목적으로 부모와 생이별하여 호주 가정으로 입양이 되거나 정부 복지시설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게 된다. 원주민 자녀들은 본인의 신분을 부끄럽게 여기고, 부족의 언어와 문화도 다 잊게 되는 시가가 1970년대까지 지속된 는데, 이 70년간을 잃어버린 세대(Stolen Generation)이라 한다. 


1967년에 비로소 원주민을 호주 시민으로 인주 조사에 포함시키게 되고, 1973년에 백호주의가 폐지되면서 법적으로 차별이 금지된다. 1992년 에디 마보(Eddie Mabo, 1936~1992)가 처음으로 원주민의 땅 소유권 분쟁 승소하였고, 1997년 5월 26일 내셔날 쏘리 데이(National Sorry Day)를 제정하고 200년 만에 처음으로  2008년 캐빈 러드(Kevin Rudd) 총리가 원주민에 대한 박해를 공식적으로 사과하게 이르렀다. 




2016년 시드니 달링하버 10층 규모의 노보텔 호텔의 흰 외벽에 애보리진 인권운동가 제니 먼로(Jenny Munro)의 얼굴이 그려졌다. 태양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 이마에 잡힌 굵은 주름이 힘든 그녀의 인생 역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결연히 다문 입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1956년에 역시 애보리진 인권운동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제니는 위라주리(Wiradjuri) 부족 출신이고 17살에 레드펀(Refern)에 와서 역시 인권 운동가인 남편을 만나 특히 원주민의 땅에 대한 소유권과 인권을 위해 투쟁의 삶을 살았고 레드펀의 더블록(The Block)이라는 원주민 공공주택을 지켜내게 되었다. 


이 대형벽화(Mural)를 그린 매트 애드넷(Matt Adnate)은 1984년 멜버른에서 태어나 그라피티(Grafitti), 음악, 스케이트보드를 좋아하고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은 없는 작가이다. 그라피티로 시작하여 이제는 인물화에 집중을 하는데, 특히 원주민 아이들을 주로 그려서 이 땅의 원래 주인이 있었음을 모두에게 알리려고 한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니 거리의 예술가라고 한정 짓는 것은 무리지만, 남반구에서 가장 큰 벽화인 20충짜리 콜링우드 하우스(Collingwood Housing estate)를 그린 유명한 거리의 예술가이다. 


매트가 영향을 많은 화가가 바로 카라바조(Michelangelo de Carravaggio)이다. 성스러웠던 예술품 속에 예수를 거지의 모습으로, 마리아를 매춘부의 모습으로 등장시켜 기독교의 눈총을 받았던 그였지만, 신의 축복을 받은 재능덕분에 살인죄를 그림으로 면죄받기도 한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포트라이트 (Spot light)를 받은 인물은 내면 심리까지도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바로 17세기 바르크 시대를 연 또 다른 미켈란젤로인 카라바죠이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 가면 원주민들이 얼굴에 하얗게 칠하고 딱, 딱, 딱, 클립 스틱(Clip Stick)으로 장단을 맞추고 부웅 ~~ 중저음이 나는 디저리두(Digeridoo)로 공연을 하고 있다. 아니면 레드펀의 원주민 공공주택에 가면 술에 취한 듯 담배를 피우며 모여 다니는 원주민을 볼 수가 있다. 


원주민의 인구는 호주 전체 인구 중 중국 이민자보다 작은 3% 를 차지한다. 얼마 전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 (Black Lives Matter, BLM)를 통해 1991년 이후로 432명의 원주민이 경찰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으나 한 명의 경찰도 책임을 지는 일이 없었다고 알게 되었다. 또 호주 수감자의 30%가 원주민이고, 원주민의 자살률은 호주 평균 자살률의 3배이다.  


원주민 출신 작가이자 발명가인 데이비드 유나이폰(David Unaipon)이 50불 지폐에 있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송화 봉송자이자 육상 금메달 리스트 제시 프리면(Cathy Freeman)이 원주민의 인권을 위해 여전히 달리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원주민에 대해서 너무 잘 모른다. 융화(Harmony)인지 문화말살인지가 잘 되어서 그들의 언어를 해석할 방법이 없기도 하고, 가장 큰 것은 무관심 때문이다. 디저리두가 남성만 부는 악기였는데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영화 홍보차 니콜 키드먼이 불다가 원주민의 원성을 사기도 했고, 그들의 신성히 여기는 울루루(Ululu)를 관광코스로 등반하기도 했었다.  


이제 울루루는 등반이 금지가 되었고 밝은 원색의 점묘화로 그리는 원주민의 미술, 웨스턴 데저트 아트(Western Desert Art)는 호주현대미술의 트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또 21회 시드니 국제 비엔날레의 주제로 "NIRIN" 원주민 말로 모서리(Edge) 라며 이 땅의 주인을 기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미국의 인디언,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우리 대한민국 역시 피해자였다. 하지만 이들은 목숨을 바쳐서 저항하고 투쟁하고 끝까지 싸웠다. 그렇기에 영토를 유지하고 권리를 인정받으며 살고 있는데 반해 애보리진은 너무 쉽게 모든 것을 빼앗겨서 현재 그들의 입지가 더욱 작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이 땅에 먼저 살았기 때문에 더 많은 특혜를 줘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원주민이든 이주민이든 지구별에 잠시 왔다가는 여행자이다. 하지만 잃어버린 세대(Stolen Genaration) 동안 사회 시스템적으로 차별의 피해가 현 세대까지 지속된다면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돕고 평등하게 자립할수 있게 해야한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도 깨어있는 시민들의 피와 촛불로 이루어내고 있듯이, 원주민들 스스로도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불평등한 사회와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제니 먼로가 했던 애기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투쟁할 거야. 그리고 난 아직 죽지 않았어. 

"I fight till I die and I ain't dead y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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