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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Jan 25. 2024

사내의 자리

봄이나 가을에는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일할 수 있으므로 앉을 시간이 별로 없다. 운전하는 동안만 앉아 있다. 그런데 앉아만 있는 게 좋은 건 아니다. 방학 중에는 연구실에서 특별히 일어설 일이 없다. 움츠리고 앉아서 부족한 지식과 기술을 보완하느라(정말?)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간다. 여름 방학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아직 해가 바뀌지 않은 때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역시 인간이란 자연과 연결된 탓일까?      


허리 통증으로 꿈쩍 못한 일을 겪었던 탓에 의식적으로 일어서는 시간을 갖는다. 백 런지라는 동작을 몇 번 하고, 끓는 물에 커피를 타고, 창밖을 바라본다.      


방학 중에는 담배 피우는 사람도 적다. 그런데 꼭 한 명은 보인다.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같은 옷차림을 한 사내가 벤치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다. 오른손은 잠바 주머니에 넣고, 왼손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스크롤하고 있는 모습. 제법 긴 시간 동안 머물기도 하고(이런 날은 젊음의 상징 ‘아아’가 놓여 있다), 잠깐 머물다 이내 사라지기도 한다.      


한 번은 길에서 우연히 사내를 마주친 적이 있다. 학교 바깥으로 사오십 분 걷고 돌아오던 참에 정문에서 만났다. 이제 집에 가는 길인가보다 싶었다. 그런데 연구실로 돌아와서 창밖을 내다봤는데, 사내가 있었다.      


“뭐지? 집에 간 게 아니었나? 답답해서 걸었나 보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자리에 잠깐 앉아서 이것저것 하다가 일어나서 창밖을 봤는데, 사내는 예의 그 자세로 스마트폰을 만지며 앉아 있었다. 추워서 잔뜩 웅크린 채로. 집에 가거나,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도 마치 휑한 벤치가 자기 자리라는 듯이 한참을 머물다가 사라졌다.      


비록 삼십 분마다 꺼지는 히터지만, 따뜻한 방에 앉아서 허리 통증을 걱정하는 나는 행복하다. 영원히 지속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현재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도록 만든다. 추운 날씨에 언제나 같은 차림으로 앉아 스마트폰을 하다가 떠나는 사내는 나에게 ‘한 사람’으로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그저 유리창 너머의 풍경처럼 여겨지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잠깐씩 그의 안부를 걱정한다. 따뜻한 곳에 들어가 한참을 머물기를, 담배 한 모금만 피우고 빨리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그에게도 생기기를.     


“오늘은 없나?”     


궁금한 마음에 창밖을 내다본다. 보이지 않는다. 대단히 추웠던 이틀 전에는 보였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해가 저물고 있으니, 어딘가로 들어갔을 터이다. 차라리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더 다행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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