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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Apr 10. 2024

억지, 억지, 억지

  억지라는 말에는 고유어와 한자어 두 개가 있다. 고유어로 '억지'는 "잘되지 않을 일을 무리하게 해내려는 고집"을 가리키고, '떼(를 쓰다)'와 유의어로 설명된다.

  한자어로 '억지(抑止)'는 "억눌러서 못하게 함. 억눌러서 그치게 함"을 가리킨다. 전쟁 억지와 같은 예시가 나와 있다. 이는 "왕성하여지거나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누름"을 가리키는 '억제(抑制)'와 비슷하게 볼 수 있다.

  내가 원하나 잘되지 않을 일(낮은 가능성)을 이루려면 억지(고집, 떼)를 부리면서 타인을 억지해야 한다. 그래서 '억지'는 한자어이든 고유어이든 무엇인가(주로 타인, 주변 요소)를 누르고 내가 원하는 상태를 추구한다는 공통된 의미 속성을 지닌다.

  부사 '억지로'에는 한자가 없다. "무리하게. 강제로"의 의미로 쓰이는 이 표현은 상대방에게 힘을 행사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것을 해내려고 할 때도 쓰인다. 

  상대방에게 억지로 밥을 먹일 수도 있지만, 억지로 밥을 먹어야 할 상황도 생긴다. 상대방에게 억지로 잠을 자라고 강요할 수도 있지만, 잠이 오지 않는데도 억지로 잠을 청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때 '내가 거부하는 나'를 향해 강제력을 행사하고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나', 혹은 '내가 원하는 상황'을 이루기 위해서는 잠재워야 할 욕망이나 욕구 같은 것은 분명 '나이지만 나가 아닌 타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억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싫어하는 것을 부정할 때와 연결되어 있다.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힘을 행사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나 자신을 향한 '억지'가 결국 나답지 않은 바깥의 요구가 내면화되는 과정 혹은 결과로부터 비롯한 것일 수 있음을 생각하면(억지로 공부하는 사람이나, 즐겁게 공부하는 사람이나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는/수용한 모습이기는 마찬가지니까), 어쩐지 씁쓸하다. 굳이 오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건, 글쎄. 억지(抑指)스러운 날이어서 그럴까. 이런 이유를 찾는 나도 참 억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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