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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Oct 09. 2024

허수아비, 우울에서 우월로

허수아비(虛數我非)

  우리 시대에 그 무엇보다 존중받는 것은 ‘팩트(fact)’다. ‘팩트’는 측정된다. 빠름과 느림, 높음과 낮음, 강함과 약함 따위 숫자로 값을 드러낼 수 있어서 환영받는다. 성취와 행복, 삶의 질에 관한 수많은 ‘팩트’는 숫자로 측정된 값으로 가득하다.

  주관적인 것을 싫어하는 시대다. 개성을 뚜렷이 드러내라고 말하면서도 ‘개성’은 쉽게 불편함이 되고는 한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추구하는 ‘개성’은 몇 가지 개성의 부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완전히 ‘나’ 홀로 추구하는 개성은 존재할 수 없다.

  완전히 ‘나’ 홀로 추구하는 개성이 없다는 사실은 하나의 개성이 그룹화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레트로 패션은 더는 누군가의 개성이 아니다. 레트로 패션을 추구하는 그룹에 수많은 사람이 속해 있다. 그룹에 속한 사람은 서로 비교된다. ‘진정한 레트로’, ‘뛰어난 감각의 레트로’, ‘어설프게 소화한 레트로’ 등 한 ‘개성’을 두고도 ‘우’와 ‘열’이 나뉜다. 측정할 수 없는 개성에 허수가 부여되고, 그 값이 쉽게 그 사람의 가치를 드러내는 값이 되기도 한다.      


  ‘도파민’이 넘치는 시대라고 말한다. 도파민은 즐거울 때는 물론 분노할 때에도 치솟는다. 말 그대로 흥분을 담당하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도파민 과잉의 시대에 우리는 흥분해 있다. 무엇을 위해 흥분하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나친 흥분 뒤에 찾아오는 것은 깊고 깊은 우울일 듯하다. 즐거운 파티가 끝나자 모두 떠나버린 텅 빈 공간은 어쩌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일지도 모른다. 현실은 고요하다. 변화가 없고, 지루한 일상이 반복된다. 흥분할 것이 필요하다. ‘숏츠’일 수도 있고, ‘악플’을 달 만한 대상일 수도 있다. 아니 그 둘은 교묘하게 들러붙는다. ‘숏츠’에 ‘악플’을 달 수도 있고, ‘악플’을 유도할 수 있는 대상을 ‘짤’이나 ‘밈’으로 만들어 퍼뜨릴 수도 있다.      


  도파민에 중독되지 않고 우울감을 극복할 방법이 있을까. 불가능에 가깝겠으나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이미 니체나 들뢰즈가 말했던, 부처가 설했던 그것이다. ‘차이’ 자체를 긍정하고, ‘차이’를 ‘동일성’에 환원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나만의 개성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고, 나의 개성이 누군가의 개성과 무리 짓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와의 동일성으로 묶이기 전에 탈주하는 것. 나만의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며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우울감에서 벗어날 방법이다.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탈주가 우리를 쉽게 ‘성과주체’(한병철)로 내몰고 만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우울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나’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 그로 인해 우울감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나 자신을 거대한 동일성에 가두어 두기 때문이다. 아직 개체로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하고 있는 ‘나’ 자신이 영원한 무의식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타자의 손아귀에 주체성을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나가 생각하는 대로의) 나’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이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분명 다르다. 심지어 매 순간 ‘나’는 달라지고 있다. ‘일 분 전의 나’와 ‘일 분 후의 나’는 ‘지금의 나’와 동일한 개체가 아니다. 이미 ‘나’는 ‘나’를 구성하는 분자들의 소멸과 생성으로 매 순간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울한 진짜 이유는 비교와 대조, 구분과 분류 때문이다. 우울함은 그룹화(분류 작업)에서 이루어진다. 단 하나의 개성으로서 ‘나’일 때 ‘나’는 이미 다른 ‘칠십구억 구천구백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 명’이 가지지 못한 개성으로 우월하다. 그러나 ‘팔만 개’, ‘팔천 개’의 그룹으로 분류하는 순간 ‘나’는 단 하나의 우월한 존재일 수 없고, 비교 우위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예컨대, 운동하지 않아 근육을 상실한 사람은 지방을 얻는다. 근육을 ‘상실’한다고 믿는 이유는 근육을 소유하는 것이 우월하다고 믿는 관점의 탓이다. 근육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들이 서로의 ‘근육량(수치)’을 비교하며(팩트 체크) 우열을 가리는 이유는, 크고 단단하고 균형 잡힌 근육이 훌륭하다고 믿는 가치관 때문이다. 이 ‘관점’과 ‘가치관’이 동일성이다. ‘팔십억 명’이 지닌 ‘팔십억 개의 개성’을 팔만 개, 팔천 개로 묶어서 형성한 동일성이다.      


  비교 우위에서 마주하는 우울함은 사실 우월함의 증거이다. ‘나’의 우월함이 세상이 정한 그룹화된 개성으로 분류되는 과정에서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나’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을 향한 분노와 그럼에도 ‘나’에게 맞는 그룹을 찾아 분류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듯한 공포가 우울감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단 하나의 나가 아닌 상황에서는 결코 우울해질 수 없다. 잃을 것이 있고, 고민이 존재하기에 우울감은 존재한다.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열등감과 함께 찾아오는 우울감은 착각이다. 나의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와 닮았을까, 나의 외모는 누구의 외모에 가까울까, 나의 소질은 세상이 원하는 소질일까, 나의 능력은 다른 사람에 비해 어떨까, 나의 직업은 다른 사람의 직업처럼 부와 명예를 가져다줄까, 힘들고 지치지만 견디는 것이 과연 이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할까. 열등감과 함께 찾아오는 우울감은 ‘단 하나의 나’에 집중하지 않고 내가 가지지 않은 것에 집중하면서 찾아오는 것이다.     


  비교와 대조는 ‘나’의 우월함을 우울함으로 매도한다. 물론, 비교와 대조로 얻어낸 성취감도 있다. 그러나 비교와 대조로 얻어낸 성취감은 달리기를 그만두는 순간(속도를 줄이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비교와 대조로써 얻은 우월함은 그렇게 쉽게 우울함으로 복귀한다.

  기억해야 한다. 믿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단 하나의 나’로서 우월하다. ‘칠십구억 구천구백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 명과 다른 나’. 그 절대적 차이에 집중하고, 아주 사소한 단 하나의 차이에도 내 존재 가치를 부여할 때 우리는 모두 우월하다.

  사회가 평가한 ‘팩트’에 비추어 바라본 ‘나’는 ‘허상’이다. ‘나’를 평가하는 수치는 모두 ‘허수(虛數)’다. 허수에 휘둘리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허수’는 ‘나’를 증명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허수아비(虛數我非)’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월하다. 우울해야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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