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는 니체에 온전히 집중하기를 바란다며 어나니머스라는 필명을 내세웠다. 아마 니체였다면 이러한 선택을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무척 잘 알려진 것처럼 니체의 철학은 "힘에의 의지", "권력에의 의지"로 명명된다. 질 들뢰즈는 니체의 철학(물론, 라이프니츠나 스피노자도 녹아들어 있지만)에서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반복을 통해 차이를 생성하는 것으로 확장한다. 이것도 결국에는 "힘에의 의지"와 연관되어 있다. 삶을 고통스러운 것이다. 지긋지긋한 삶을 끝내고 영원한 안식을 얻고자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니체를 흡수하면서 만약 삶이 그러하다고 하더라도 삶을 한 번 더 살아갈 수 있는 긍정을 주장한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되감아 처음부터 똑같이 반복재생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고 죽는 삶의 과정(생의 메커니즘)을 한번 더 반복하겠다는 의지이고 설령 그 결과가 지금과 똑같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반복해 보려는 의지에 가깝다.
이처럼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었음에도 다시 태어나 삶을 살아내겠다는 선언은 이른바 '주사위 던지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표현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읽을 수 있다).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를 긍정하는 것, 그리고 또다시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여기에서 주사위의 숫자는 의미가 없다. 오직 주사위를 반복해서 던지는 과정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니체는 지금까지도 위대한 철학자가 되어 있다. 결과의 가치를 결정하는 도덕, 법, 종교 등의 거대한 기준을 부정하고 나의 삶과 행동, 선택들이 가져올 모든 숫자들을 긍정할 가능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악인의 탄생을 부추겼다는 세인의 비판이 있지만, 니체의 주장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시대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부정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차이와 다양성, 자기 삶의 긍정에 관한 한 니체를 거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옮긴이에 따르면, 이 책은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초판을 번역하되, 현재 한국인에게 잘 와닿을 수 있도록 상황이나 예시를 수정한 것이라고 한다. 니체를 변용한 매력적인 자기 계발서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니체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자칫 니체가 정말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오해를 석연찮게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진지한 번역본이나 니체의 잠언을 모아둔 책을 먼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띄어쓰기에 관한 오류가 더러 보여 아쉬움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