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무해함과 물성을 바라게 하는가
시대 경향으로 꼽힌 단어 중에서 '무해력'("트렌드 코리아 2025")이란 말이 생각난다.
귀엽고 깜찍한, 천진난만하면서도 이기적이지는 않음은 허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선하고 여리기에 보살펴야 할 듯한 존재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일이란, 결국 타자 위에 군림하면서 느끼는 쾌감과도 맞닿는다. 악동처럼 보이지만 결국 '나'보다 나약한 존재를 향한 미소도 같은 영역에 포함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무해력은 타자의 존재를 없애버리는 일과도 맞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트렌드 코리아 2025에서 말하는 물성매력도 무해력과 관계가 된다. 무해한 존재들은 내 손아귀에서 주무를 수 있다. 그들은 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다. 그런 존재들을 향한 매력은 가상세계에서 느끼는 피로감을 물리적인 교감으로 씻어내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물성은 가상으로 들어서기 이전에 우리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 안으로 실질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일상이 완전히 이사하게 된 순간부터 물성을 향한 거부감과 그리움은 예견되었을지도 모른다.
지인의 말처럼, 우리의 눈동자는 오직 앞만 보고 있다. 나의 눈을 움직이기보다 바라보고 있는 화면을 조정하면서 옮기면서, 그것도 싫으면 인공지능에게 읽어달라고 말하면 그만인 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의 시선은 말 그대로 소통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물리적인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을 때 우리는 견딜 수 있는가. 내 마음대로 닫거나 열 수도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도 없는 사람과 시간과 공간들. 내가 원하는 필터로 덧씌울 수도 없는 이 물리적인 공간 속에서 우리는 견뎌낼 수 있을까.
무해한 존재들과 물성을 향한 '지향'은 결국 나르시시즘의 확대와 연관되는지도 모른다. 결코 부딪치고 싶지도 부딪히고 싶지도 않은. 능동이든 피동이든 부딪는 일 자체를 향한 거부감, 그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거부하는 아니 고통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욕망이 그 두 단어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두 단어를 방패 삼아 세상을 살아가려는 몸부림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꿈꾸는 행복한 세상은 결국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는 일이 수반된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는 일이 그들을 게토에 가둠으로써 가능할 수는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