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bout THINGs

가방

있으면 짐, 없으면 찜찜

by 정선생

누가 나에게 가방에 무엇을 넣고 다니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넣고 다니는 물건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넣고 다니는 물건을 일일이 말하면, 괜한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고, 호기심은 대답하기 싫은 질문으로 쉽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가진 물건을 듣고, "물건을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다녀?"라며 조롱할지도 모른다. 조롱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굳이 들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내 생애 첫 가방은 야음유아원(어머니께서 그나마 유아원이라도 보냈었다고 말씀하신 걸 보면, 당시 유치원보다는 조금 저렴하고 내세울 만한 곳은 아니라고 여겨진 모양이다)의 노란 원생용 가방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도 내가 가진 가방이라고는, 대부분의 내 또래가 그랬겠지만, 책가방이 전부였다. 초등학교 때 매던 캐릭터가 그려진 푸른색의 직사각형 가방, 중고등학교 때 매던 배낭형태의 가방은 모두 공부할 때 필요한 물건들로만 가득했다.


군대에서 매던 군장도 가방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가방은 책 대신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품들로 가득했다(오히려 그 무거운 걸 매고 가다가 죽을 것 같았지만, 뒤에서 날아오는 총알 하나 정도는 막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전쟁은 안 된다). 책가방이든 군장이든 그 속에 든 물건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대학생 때까지도 가방을 썼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특별히 짐을 싸야 할 일이 없어서 굳이 가방을 사용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가방 없이 지갑과 휴대전화를 포개어 손에 쥐고 다니기도 했었다. 물론 졸업 후 1년 뒤,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노트북을 넣기 위한 백팩을 잠깐 사용했었지만, 그 마저도 귀찮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얼마 후 대학원 연구실에 노트북을 데스크톱처럼 놓고 다니는 것이 더 편해지면서 가방을 조금 소홀히 했던 것 같다. 물론 필름카메라로 사진 찍는 취미가 생겨서 그걸 넣고 다니느라 가방을 쓰긴 했다.

아내가 연애시절에 선물해 준 샘쏘나이트 가방. A4 사이즈의 서류는 들어가지 않는다. 작은 수첩과 지갑, 필기구와 휴대전화를 넣고 다닌다.

2010년부터 아버지께서 동생과 나를 위해 직원할인을 받아서 마련해 주신(당연히 아버지 명의로 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가방을 쓰는 일이 더욱 줄어 들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방을 매고 다니는 일이 줄어 들었다.


지금은 아버지께서 직장에 다니실 때 샤워 수건이나 작업복 등을 넣으려고 구입하셨던 가방을 강의하러 다닐 때 쓴다. 피에르가르뎅의 그 가방은 애초에 서류가방으로 생산된 것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그 가방을 몇 번 쓰지 않으셨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아내가 선물해 준 가방이다. 샘쏘나이트의 작은 크로스백인데, 휴대전화, 지갑, 자동차키가 상주하며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는 가방이다. 지금도 가죽이 닳을까 애지중지하는데, 그럼에도 많이 닳았다.


마지막으로 자동차 글로브박스 안에 상주하고 있는 나이키 크로스백이 있다. 석사과정생일 때, 신발을 살까 싶어서 대학원 동기인 형과 함께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충동구매한 것이다. 비상용으로 항시 대기중이다.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가지고 다니면 불편할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방을 싸거나, 들고 다닐 때는 내가 뭔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가진 물건들이 하나의 작은 공간에 들어가 있다는 안락한 느낌이 좋다. 별거 아니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을 넣고 다니면 든든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지난 경주지진과 포항지진이 있은 후에 폐점 정리하는 매장에서 싸구려 배낭을 사서 피난(?)가방을 꾸려 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그 배낭을 보면, 무조건 생존할 것 같다는 터무니없는 확신을 하게 된다.


만약 우리들의 삶이 계속 힘들어져서 한 곳에 정착하기 힘든 시대가 된다면, 가방은 나의 삶 자체가 될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결코 없었으면 좋겠다. 유랑이 낭만적이긴 하나, 우리는 정착에 더 익숙한 민족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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