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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Aug 29. 2018

땅에 내려 앉지 않아야 할…

황동규, 「조그만 사랑 노래」

1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문학과지성사, 1978)에 실린 사랑 시. 요즘 젊은이들도 이 시를 읽고 공감할 수 있는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나 역시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나는 기성품 같은 감성의 소유자니까 말이다.


2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눈은 함박눈이 아니어서 충분히 무겁지 않다. 밀도가 낮은 눈은 바람에 날리기 바쁘다. 행여 땅에 떨어진다한들 이내 땅의 열기로 녹고 만다.


땅은 현실이다. 중력을 거부할 수 없는 우리들의 삶은 오직 땅 위에서 가능하다. 어쩌면 중력을 벗어난다는 것은 공포일지도 모른다. 떠다니는 것에 대한 두려움. 치열한 생존의 열기에 사랑의 추억 따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은 현재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저 지나간 시간일 뿐이다. 그 기억은 오직 "어제를 동여맨 편지"처럼 전달될 뿐이다. 단단한 매듭으로 봉한 그 편지를 받아 들고, 제 아무리 그대를 찾아나서려 해도 소용없다. 이미 사라진 주소. 그대에게 이르는 길은 이미 사라졌고, 어쩌면 길이라고 믿었을 "길이 아닌 것"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는 일처럼 서글프고 부질 없는 짓이 있을까. 사랑이 아닌 다른 기억인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붙드는 일만큼 처량한 짓이 있을까. 중력에 의지해 땅을 딛고 사는 우리는 이리저리 흩날리는 "몇 송이 눈"처럼 찾아온 그 기억들을, 그저 무신경하게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땅 위에 사는 우리들의 의젓함이 아닐까. 혹은 중력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3

해마다 봄 가을 겨울이 되면 어제의 기억은 반복해서 찾아온다. 벚꽃잎으로 낙엽으로 눈으로. 하릴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뻗는다. 손에 쥐면 시들고 바스라지고 녹아버린다. 그 허망함으로, 잡으려 하지 않을 때 기억은 더 오래 산다는 것을 안다. 발 밑에 있는 땅의 소중함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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